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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쉰네 번째 뉴스레터는 미국 이민 한인 1세대이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진 신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말 설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해진 시기,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하와이의 농장주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에게 노동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선교사는 고종을 설득해 이민자를 모집하였고, 1903년 1월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000여명 가량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향하였죠.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젊은 남자였습니다.
일부의 한인 노동자가 혼인한 상태로 이주했으나 대부분은 미혼 남자였는데, 당시 하와이 원주민 여성과의 결혼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동양인과 백인의 결혼이 금지되어있었습니다. 한인을 비롯한 동양인 남성 노동자들의 일의 능력이 저조했고 술과 노름 아편에 빠지거나 여성을 강간하는 일도 있었는데, 농장주들은 이러한 문제가 그 남자들이 '미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동양인 남성 노동자 문제점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본국의 여성과 원거리 중매를 하는 사진 결혼이었습니다.
그 시작이 너무나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당차고 용기있는 삶을 선택한 여성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볼게요.
사진 신부 또는 사진 결혼이라 일컬어지는 개념은 미주 일본인들이 미국과의 협정에서 가족 입국을 허용하는 비자 발급 제도를 활용하여 사진을 통해 중매 결혼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결혼이 시행되던 당시는 일제 강점기 초기였고, 한인 역시 해당 제도를 이용해 하와이에 먼저 이주해 있던 남자들이 조선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10~1924년 사이 사진 결혼을 통해 미국에 온 여성들은 약 6백 명에서 많게는 1천 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와이 정부는 이에 ‘사진결혼법’을 합법화하여 사진교환으로 하와이에 젊은 여성들이 입국하는 것을 허가하기도 하였죠.
사실 ‘사진 신부’라는 단어만 보면 현재의 “국제결혼”과 유사하게 남자가 여러 여성의 사진 중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을 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성들이 하와이에서 보내온 서너 장 사진의 남자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고, 그 후 남자도 자신을 선택해 준 여성의 사진을 받아 승낙하면 결혼을 진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때로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이 밖을 나가기도 어려웠고 집안에서 정해주는 혼처로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해야했던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사진 결혼은 오히려 자유연애에 가까웠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결정하게 되면, 남자는 혼인 수속과 뱃삯을 포함한 여비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런 후 여성이 10여 일간의 항해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죠. 배에서 여성들은 가장 아래층에 갇힌 채로 있었고, 갑판 위로 나갈 수도 없어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도착 후 정식 부부로 인정을 받으면 상륙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진 신부들은 미주 한인 1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삶과 자유를 위해서, 봉건 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사진 신부 중 일부는 교육을 통한 애국을 위해 미국행을 택하였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사진 결혼이 활성화 되었던 시기에는 일본이 교육을 통제하며 한인들이 일본어를 사용했어야 했고, 이에 모국어를 사용하며 공부하는 자유를 찾기 위해 사진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죠.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학교 이상 교육을 마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먼저 이주한 한인 남자 노동자 상당수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한인 사회의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점이 많았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며 서구의 문화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었고, 교육과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싹틔울 수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주체적 삶과 자유에 대한 동기로 이역만리로의 이주라는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들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사진만 보고 선택하여 결혼을 하다보니, 보내온 사진과 실제 남편이 될 남자가 다른 경우도 있었고 10년 전 사진을 지금의 사진인 것처럼 속여 보낸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가장 많이 속이는 것은 나이였습니다. 16세의 여성과 75세의 남자가 사진 결혼을 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노총각이 많았던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사진 결혼은 보통 남자가 여성의 2배가량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죠. 75세의 그 남자는 40세라고 속여 사진 결혼을 한 경우였습니다.
남자들이 실제 나이가 많았을 뿐 아니라 농사를 지으며 오랜 노동으로 신체 노화가 더 빨랐고, 사진 신부들이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동안 남편들은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노동에까지 대신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부터 가정부 업무, 세탁 업무 등 여러 일을 해나가며 그들은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더불어 한인 사회의 독신 남성들의 식사와 빨래까지 담당했다고 하니, 하와이 한인 사회는 사진 신부들에게 경제 문화 사회적 영역을 의존을 한 것이죠.
사진 신부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고 그들에게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가르치며 미주 한인 사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아이들의 교육에도 큰 열의를 보여 살림과 교육을 위해 힘들게 일했죠. 그들의 교육열은 자식들 개개인의 출세가 목적이 아닌 민족 해방을 위한 것에서 기인했습니다. 사진 신부들은 상당수 자신의 공부와 교육에 목적을 두고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진보적이고 사회와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사진 신부들은 돈을 모아 모국의 독립 자금을 모았는데, 대한인부인구제회를 비롯한 부인회를 조직하여 떡이나 묵을 만들어 팔았고 이를 독립 자금으로 전달했습니다. 부인회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며 독립 자금을 모았는데, 여성 국극처럼 여성이 남자 역할을 하는 연극을 올려 그 수익을 독립 자금으로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한 1920년도 중반쯤엔 독립 선언서 포스터를 만들어서 독립기금을 모금하여 2천 달러를 모았고, 이후 지속적으로 독립 기금을 모금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 군정서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진 신부들이 남성을 도와 독립 운동을 한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죠.
모은 독립 자금을 조선에 가서 전달했던 고 이희경님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1년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딸 메리 자보와 함께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또 다른 사진 신부 고 천연희님도 독립운동 참여 기록이 발견되어 지난 8월 15일 광복절 포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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