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별의 조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가 팽창하며 행성과 항성들이 만들어질 때, 그 잔해가 모여 지구가 되었고 지구의 부스러기가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인간 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것은 우주가 남긴 부스러기가 다시 뭉쳐진 것입니다.
우주의 부스러기일 뿐인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과거의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후회하며 이불을 차는 수많은 밤들처럼요.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무엇일까?
이번 9월호에서는 이 질문에 답해보려 합니다. 잉크들도 저마다의 답을 생각해보며 이면지에 적힌 글들을 따라와주세요.
1
저수지가 새끼 오리가 된 건에 대하여
인간은 원래 변온동물이래.
무슨 말인가 싶지. 우리가 수업에서, 책에서, 영상에서 배운 건 “인간은 포유동물로서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 않고 온도를 일정한 범위 내로 유지하는 정온동물”이라는 내용이니까. 나도 처음엔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 학자들 사이에서 주류로 믿어지는 내용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그치만 나는 경험해 버렸어. 인간의 온도는 주변에 영향받아 한없이 차가워졌다가 더없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정론으로 믿어지는 가설을 나만의 논리로 부수면, 그리고 그게 여러 사람의 동의를 받기 시작하면 그땐 진리로 여겨지던 내용이 의심받기 시작하지. 그렇게 세상은 한 번 뒤집히고 다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굴러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뀐 것처럼, 태양계 행성에서 명왕성이 퇴출당한 것처럼. 그래 그렇게. 그러니 인간이 변온동물이라는 사실도 언젠간 받아들여질지 몰라.
네모 씨는 어느 순간 결혼으로 맺어진 또 하나의 가족에서 겉도는 느낌을 받았어. 같은 시간, 같은 장소, 심지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섞이지 못하는 것 같았지. 네모 씨는 그들과 있을 때면 눈에 생기가 사라져 갔고, 입가에는 미소를 잃어갔고, 손은 핸드폰을 향했어.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 네모 씨는 공명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했어. 그렇지만 며칠 전부터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인 동그라미 씨가 속마음을 전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지. 그는 네모 씨가 가족들에게 한 노력에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네모 씨의 태도에 적대감을 표하던 동그라미 씨가 이런 얘기를 하니 네모 씨는 놀랐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그라미 씨의 얘기를 듣고 네모 씨가 눈물을 흘렸다고도 했어. 그 이후 네모 씨는 가족들과 함께할 때 눈을 맞추고 소리 내어 웃고 먼저 장난도 치게 되었어. 공허하고 차가운, 안개 낀 저수지의 색채를 띠던 사람이 갓 부화해 어미를 인식한 새끼 오리의 색채를 띠게 된 거야.
네모 씨를 봐. 인간이 어떻게 정온동물일 수 있겠어. 우리는 곁에 누가 있는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다른 온도가 되고 다른 색채를 띠고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걸. 손끝과 발끝이 차가워지다가도 금세 얼굴이 벌게지며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거야. 언젠가 사람들도 인정할 날이 올 거야. 인간은 원래 변온동물이라는 사실을.
2
인간은 원래 혼자래
인간은 원래 혼자래
인간은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 생각이 깨지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어. 다시 생각해 보면 온전히 혼자 존재할 수 있나? 의문을 던지게 돼. 인간도 비인간도 말이야. 비인간의 삶은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도 주변으로 사람들이 지나가. 그러면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삶 속의 인물이 돼. 집에 혼자 있다가도 말야, 화면이 번쩍 하고는 연락이 하나 둘 오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사람들과 연결되는 거지. 물리적으로 혼자일 수는 있으나 셀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과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어. 괜히 몸이 닿아 있는 느낌이 들어.
최근에는 많이 무너진 일상을 보내고 있어. 근육이 생기려다가도 다시금 골조가 무너지고 말아. 어찌저찌 다시 세워서 근육도 없는 상태로 마구 걷는 거야. 혼자가 아닌데 혼자인 것 같다? 물리적으로 혼자인 것과는 달랐어. 살면서 힘듦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니까 힘들 때는 작은 자극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잖아. 그 작은 자극을 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럴 때 어떤 감정에 있는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 그걸 오늘 처음 이야기해 봤어. 그런다고 갑자기 나아지진 않지만 생경한 경험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것 같아. 결국 나는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거지.
이거 봐, 인간은 원래 혼자일 수 없대.
3
인간은 원래 희곡의 일부래
등장인물 | 인터뷰 대상자, 카메라.
시간 | 형광 파랑색 해가 노을 지는 때
공간 | 압생트로 가득 물든 세계
푸른 해가 네온사인 같은 빛을 발광하며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한창이다. 세계는 모두 압생트로 물들었다. 가득 찬 형광색은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빛나고 있다. 이상하고 아늑하다.
카메라 네, 여기 앞에 앉으시면 되세요. 아뇨 대본은 없어요. 인터뷰에 무슨 대본이에요? 그런 건 없죠, 네, 네. 어, 식사는 하셨어요? 아 아직? 이따 같이 드시러 가시죠. 짜장면 좋아하세요? 이 앞에 중국 당면으로 만든 짜장면을 파는데 아주 맛있어요. 네, 이따 같이 가시죠. 물 드릴까요? 아 제가 손이 없는데 어떻게 물을 주냐고요? 그거야…
어디선가 물이 날아와서 인터뷰 대상자 위에 떨어진다. 인터뷰 대상자, 물에 쫄딱 젖은 꼴이 되었다.
카메라 흠흠. 네. 그러면 시작해 보겠습니다. 카메라 롤!
빨간 조명이 켜진다. 빨간빛은 공간 전체를 장악한다.
카메라 인생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네 처음부터요. 아 태어난 것부터요? 그렇게 일찍은 말고요. 기억이 있는 때부터요. 다른 사람의 기억 말고, 자기 자신의 기억으로만 말해주세요.
인터뷰 대상자는 질의한다.
카메라 모든 것은 다 연기라고요? 괜찮아요, 그것도 당신이니까.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요? 괜찮아요. 원래 자기가 누군지 다 몰라요. 말하는 내가 진짜 나고 말한 적 없는 나도 진짜 나일 뿐이에요. (사이) 그래도 여기서는 말하는 부분까지만 당신이에요. 말해지는 부분까지만. 네. 좋아요, 그럼 당신이 연기했던 모든 당신을 알려주세요.
조명이 압생트 빛으로 느리게 점멸한다.
인터뷰 대상자 첫 번째 나는 누구지? 두 번째 나는? 세 번째는? 네 번째는 있나? 나는 누구를 따라 하고 있지? 누구를 연기하지? 연기한 누군가는 내가 될 수 있나?
조명이 아주 세게 점멸한다. 이내 카메라가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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