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내 자아는 여러 가지다. 명함에는 기록연구사라고 쓰여있지만 박물관에 소속되어 학예 업무를 상당 부분 맡고 있고, 박물관과 따로 분리된 건물의 전시실 운영을 총괄하며 예산과 행정, 시설관리까지 담당하고 있다. 주요 귀빈이 왔을 때는 도슨트가 되어 전시 콘텐츠를 소개하기도 하고, 서포터즈 학생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박물관 교육사가 되기도 한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기록인들이 여러 페르소나를 갖고 일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이직하기 전 ‘기록물관리전문요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일반행정으로 입사한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회사 내에서 나의 입지, 즉 전문분야를 쉽고 빠르게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가 더 우월하다고 넘겨짚고, 당시 내 능력에 비해 더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별다른 경력도 없는 내가 석사학위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문가로 인정받을리 만무했다.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전공했고, 기록관리 분야로 지원해 입사했는데 왜 막내라는 이유로 기록관리와 상관없는 업무까지 맡아야 하는 걸까 억울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의 딜레마처럼 주어진 일을 어쩔 수 없이 처리하다가도 본연의 업무보다 주변부의 일들이 점점 더 커지는 걸 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기도 했다.
이곳에 있으면 내가 그동안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겠구나. 나의 무너진 커리어를 어떻게 회복할까 어깨가 무거울 즈음에 제현주 작가의 『일하는 마음(나를 키우며 일하는 법)』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제현주 작가는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후 11년 동안 투자 컨설턴트로 다양한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퇴사 후 전자책, 팟캐스트, 협동조합 운영 등 N잡러로 일했다. 2017년부터는 6년 간의 N잡러 생활을 청산한 후 옐로우독이라는 벤처캐피탈 회사에서 투자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일하는 마음』은 작가가 회사로 다시 돌아간 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즈음에 쓴 책이라고 한다.
일하는 분야는 크게 다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때로는 도망치고 싶지만, 더 잘하고 싶은 우리의 일하는 마음에 관하여’라는 소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전문성이 아닌 탁월성을 추구하라는 조언, 분절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일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맞춰 파편된 경험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연결지을 수 있다는 말에 머리를 띵 맞은 듯 했다. 주말을 할애해서 읽은 책은 그로부터 한동안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나의 바이블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깨달음도 어느덧 희미해지고, 나도 결국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동안 버티다가 지금 일하는 곳으로 이직을 했다. 굳이 힘주어 설득하지 않아도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구성원들과 일하는 건 행운이었다. 그러나 기록관리가 후순위로 밀리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기록관리에 쏟을 시간은 없는데 기관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사람들의 기대치는 높았고, 조직의 특성상 주변 동료들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박물관과 별도로 떨어진 전시실의 예산과 운영까지 홀로 책임져야했다.
도대체 내 업무와 학예사의 업무가 다른 점이 뭐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다른 일들에 양보해야 할까. 마음이 어두워지고 막막해질 때 다시 제현주 작가의 책을 꺼내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갖고 있었던 ‘기록전문가’의 상이 너무 이상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되돌아보게 됐다. 어떤 표준이나 규정에 열거된 기록전문가의 역할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가 속한 기관의 사정이나 성격은 다양한데, 정해진 업무 외에는 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오히려 더 융통성이 없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종적으로는 이상향에 가까워져야겠지만, 당장 그 모습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나 자신을 탓하는 건 너무 해로운 습관이었다.
결국 기록전문가에게 주어진 의무를 당장 모두 이행할 수 없다면 이것저것 분절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나의 관점으로 조합하고 해석하는 것이 차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견고한 교량까지는 못 만들더라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디딤돌을 하나 놓는 건 지금도 가능한 영역이니까. 심지어는 내 다음 커리어가 꼭 기록관리 분야가 아닐지라도 내가 했던 일들을 연결시켜 의미있는 이야기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함을 길러야겠다고 다짐했다.
Half Archivist, Half Curator. 현재 내 포지션을 설명하는 단어다. 기록전문가와 학예사 그 중간의 사람이다. 『일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직업적 관점을 떠나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아마 나의 중심 기술은 “정보를 수집하고 구조화하는 일”이 될 것 같다. 퇴근 후 기록학 스터디, 지금 작성하고 있는 이 뉴스레터까지 더하면 “나의 경험을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하는 일” 또한 부차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겠다. 단 한 명의 기록인이라도 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유연한 마음으로 자신과 일을 대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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