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부산광역시 보도자료(2026. 4. 23.)
올해 4월 부산기록원 건립이 행정안전부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을 때, 이제 되었구나 싶었다. 북구 금곡동이라는 부지에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일단 출발한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주 시의회 기획재경위원회가 실시설계의 전제인 공유재산관리계획 승인을 붙들어 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월 심의에서 한 차례 보류된 뒤 이번 회기 상정도 불확실하다고 한다. 과연 이 사업은 돈이 없어서 멈춘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사실을 정리해 두자.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1조는 광역자치단체장에게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설치하고 운영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2007년 전부개정으로 이 조항이 만들어진 지 2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실제로 문을 연 곳은 2018년 경상남도기록원과 2019년 서울기록원 두 곳뿐이다. 제2의 도시 부산도 법정 의무를 그만큼 미뤄 온 자치단체에 속한다. 그 숙제가 이제야 연면적 8,586제곱미터, 시비 465억 원, 2031년 개원이라는 모양을 갖추었다.
의회가 든 반대 논거는 재정 부담과 공공건물 공실 위험이다. 서부행정복합타운이나 재송동 유니콘타워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부산기록원 건립을 둘러싼 시의회 회의록을 읽다가 몇 번이고 같은 대목에서 멈췄다. 시의원은 시청 지하에 있는 기록관과 새로 설립할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구분하지 못한 채 기존 기록관을 이전하는 사업으로 이해한다. 기록원의 기능과 시설 요건을 충분히 검토하기도 전에 다른 공공청사의 지하에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곳이 어렵다면 아직 설계도 시작하지 않은 다른 건물에 들어가면 된다는 제안이 이어진다. 시민들이 많이 찾아오는 시설도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부산시 역시 시민의 관람이 기록원의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라는 취지로 답한다. 기록원이 어떤 기관인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데 들어갈 건물의 후보지는 금세 늘어난다.
행정의 건물 총량을 따지는 심의 자체는 의회의 본령이다. 다만 기록물 보존서고는 사무실과 성격이 다르다. 서가 하중을 견딜 구조 설계, 항온항습 설비, 소방과 보안 동선이 법령과 표준으로 정해지는 특수시설이다. 시의 설명대로 기존 건물을 전용하려면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하고 다섯 개 층 규모의 임차료가 신축비를 넘어선다면, 아끼려던 예산은 이름만 바꾸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차이는 물리적 조건에만 있지 않다. 기록원은 기록을 단순히 쌓아 두는 보관소가 아니라 시민과 연구자가 기록을 매개로 만나고 교류하며 부산의 기억을 영구히 아카이빙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목적부터 다르다.
물론 시의원이 기록관과 기록원의 차이를 처음부터 알 필요는 없다. 모르면 물으면 된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간과 비용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차이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은 부산시에 있다. 공유재산관리계획을 심의하는 자리이니 재정관이 답변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재정관에게 기록관리학 강의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기록원을 설립하는 일이 공유재산의 취득 문제로만 다루어진다면 기록관리 정책의 관점에서는 누가 이 사업을 설명하는가? 서고의 구조하중과 항온항습 조건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설립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부산이 어떤 기록을 수집하고 보존할지, 시와 구·군의 기록관리체계를 어떻게 연결할지, 시민이 기록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누가 설명하고 어디에서 검증하는가?
같은 맥락에서 현장에서 기록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계획 수립과 의사결정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의견을 구했다면 누구에게 무엇을 물었고 그 결과가 실제 계획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회가 기록원을 단순한 보존시설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인식을 바로잡는 일 역시 부산시의 책임이다. 공유재산에 관한 판단이 전문기관의 설립에 관한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다.
건물을 먼저 짓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할지 나중에 고민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더 곤란한 상황은 건물의 용도를 정했다고 기관의 역할까지 결정되었다고 믿는 경우다. 전시실이 있다고 미술관이 되는 것이 아니며, 서고가 있다고 기록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건물은 준공되지만 기관의 기능은 그 이후에도 계속 변화한다. 그런데 건물이 먼저 결정한 조건은 이후 기관이 할 수 있는 일까지 제한한다. 동선과 공간의 구획은 물론 미래의 컬렉션 규모와 이용 방식까지 건축 단계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기관은 건물을 사용하지만 때로는 건물에 의해 운영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록원을 기존 청사의 남는 공간에 넣겠다는 주장도, 독립된 새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도 그 자체로 충분한 답은 아니다. 먼저 어떤 기관을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 판단에 따라 공간이 설계되어야 한다. 기록원의 역할을 고민하지 않은 채 공간부터 짜맞추려는 시도는 결정을 미루게 하고, 결국 도시의 기록을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방치의 비용은 회계에 잡히지 않는다. 시는 2053년까지 보존 대상 기록물이 94만 권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받을 곳이 없는 동안 그 기록은 각 기관 서고와 임시 보관처에 흩어져 삭아 간다. 공공기록만의 문제도 아니다. 피란수도의 흔적, 매축과 산업화의 도면, 원도심 상가의 장부와 사진은 대개 개인의 집과 창고에 남아 있다. 수집할 기관이 없으면 기증 의사가 있어도 받을 수 없고, 그렇게 흩어진 자료는 대개 한 세대가 지나면 사라진다. 기록원 없는 도시는 끝내 자기 서사를 남이 모아 둔 자료로 설명하게 된다.
부산은 2017년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는 데 참여했고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역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도시가 지닌 역사적 자산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정작 그 도시의 공공과 민간기록물을 장기적으로 관리하고 시민에게 제공할 기관을 설립하는 자리에서는 기록원의 역할조차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 물론 유네스코 유산 등재와 지방기록원 설립은 서로 다른 사업이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한다는 점에서 두 정책이 지향하는 공적 가치는 맞닿아 있다. 세계에 보여 줄 부산의 역사는 중요하고 앞으로 생산될 부산의 기록은 그저 보관할 공간만 확보하면 되는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의회에 사업을 접으라는 답보다 조건을 내놓는 답을 기대한다. 부결은 판단을 미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공실 우려가 실제라면 유휴 공공건물의 구조 보강 비용과 신축비를 나란히 산정해 공개하라고 요구하면 된다. 운영비가 걱정이라면 인력 규모와 수집 범위를 명시한 운영계획을 제출받으면 된다. 예산 검증은 사업을 멈춰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부산시가 제대로 된 기록원의 청사진을 내놓도록 압박하는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그 청사진에는 부산의 무엇을 수집하고 누구에게 어떻게 열어 둘지가 담겨야 한다. 심의는 그렇게 쓰일 때 책임이 된다. 의회는 추가 검토를 요구할 수 있다. 부산시는 그 요구에 답하면서 기록원이 어떤 기관이어야 하는지도 설득해야 한다.
지금 보류된 것은 건립계획의 승인과 그에 따른 예산 집행이다.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설치해야 할 부산시의 책임까지 보류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보류가 함께 미루는 것은 부산이 자기 기억을 보관할 자격을 갖추는 시점이다. 2031년 개원도 이미 늦은 일정이다. 우리는 지금 단순히 건물 한 채를 확보하려는 게 아니다. 부산의 기록을 책임질 기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 기관의 미래가 주차장과 빈 사무실을 둘러싼 계산만으로 결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혹자는 기록원 하나로 도시의 기억이 지켜지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적어도 받을 곳부터 있어야 그다음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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