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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의 재기억하기 Undoing Memory Practices on Nature

비인간과 인간 주체들의 기록 매커니즘과 확장된 아카이브 가능성

2025.09.22 | 조회 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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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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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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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에 살던 시절, 할머니께서는 산이나 길가에서 발견하신 식물들을 채집하거나 기록하시곤 하셨다. 집에는 할머니께서 매일같이 써오신 식물일지들이 자개장롱 위의 대나무 선반에 날짜순으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근처 문방구에서 스프링 노트들을 한 아름 사오신 뒤 발견한 식물들의 이름, 특징, 발견 날짜 등을 적고 옆에는 관찰한 식물들의 모습을 그리시거나 채집한 이파리 등을 붙이셨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절이나 장을 보러 가는 길에 기록한 식물들이 있으시면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시거나 일지를 보여 주곤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비록 여러 사회적인 벽 때문에 교육제도의 수혜를 받지 못하셨지만 섬의 생물들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박학다식하시고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안타깝게도 몇 번의 이사를 겪으며 할머니의 식물 일지들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할머니께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에게 일지를 보여주며 자신의 관찰을 설명해주시는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 식물의 이름을 아시는지? (*정답은 글 맨 밑에)
이 식물의 이름을 아시는지? (*정답은 글 맨 밑에)

가덕도 (*이전 글 참조)에 대한 기록 연구를 이어가면서 생태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는데 두 민간 프로젝트들이 눈에 띄었다.  2022년 아름다운 재단의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부산 녹색연합의 가덕도 생태계조사 그리고 역시 같은 해 진행된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의 지원을 받은 부산그린트러스트의 “가덕도 국수봉 100년 숲”가 그렇다. 두 사업 모두 가덕도 신공항 건설 계획에 대응해서 일어난, 섬의 생태학적 가치와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리서치에 대해서 읽으며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비인간 주체들은 어떻게 기록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기록 방식은 어떻게 생겨났고 기록 방식은 우리가 생태를 인지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때마침 이번 해 초 버나드대 여성학 연구센터에서 있었던 바누 서브라마니암 (Bahnu Subramaniam)의 강연, “Botany of Empire (번역: 제국의 식물학)” 보았고, 같은 제목인 그의 책을 읽었다. 

"Botany of Empire: Plant Worlds and the Scientific Legacies of Colonialism (2024)"의 책표지

바누의 설명에 의하면, 식물 연구는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목표와 얽히게 되었는데, 이들은 점령 식민지들에 존재하는 “자원”에 대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18세기 후반 열대 식물원들의 설립은 이러한 유럽 제국주의의 과시적인 야욕이 잘 드러난 예라 볼 수 있다. 조지프 뱅크스 같은 수집가들은 대영제국을 위해 지형, 식물 등 다양한 자원을 기록했으며, 국가와 대륙 간에 종을 이식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추구했다. 바누는 식물학이 어떻게 식민주의에 따라 형성되었고, 어떻게 그러한 역사가 현재의 식물학에 아직도 영향을 끼치며, 이러한 잔재들에 맞서 어떻게 다학제적이고 탈식민지적인 식물학을 고민할 수 있을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해당 책을 썼다고 한다. (“My main goals are threefold: explore how botany was shaped by colonialism; demonstrate how that history endures in contemporary botany; and ask how we might undo these legacies to imagine an interdisciplinary and coluntercolonial botany that is less anthropocentric and more empirically attune to plant worlds).

버나드대 여성학 연구소에서 강연중인 바누 서브라마니암 (Bahnu Subramaniam).
버나드대 여성학 연구소에서 강연중인 바누 서브라마니암 (Bahnu Subramaniam).

한국 또한 식물기록과 연구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식민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다.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 활발하게 연구된 학문은 자연사, 당시의 명칭으로는 박물학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식물 연구는 특히 많은 관심 속에서 이루어져 근대 식물학이 형성되는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연구는 총독부의 임업시험장 및 수원 농림학교뿐만 아니라 민간의 생약 관련 연구 및 교육 기관, 초·중등 과학교육의 핵심이었던 박물교실 등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중에는 총독부 촉탁이자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조선 식물 권위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 임업시험장에서 그와 협력하며 조선 식물 연구에 착수했던 이시도야 쓰토무(石谷勉, 1891-1958), 나카이의 통역을 맡았던 임업시험장의 정태현(鄭台鉉, 1883-1971), 일본에서 교육받은 경성약학전문학교 교수 도봉섭(都逢涉, 1904-?)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1969년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되었다는 이화여대 자연사 박물관이 집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방문했다. 박물관에서는 때마침 "지구 생물들의 기후변화 위기로 인한 생존기"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미 멸종되거나 희귀종으로 분류된 동식물 표본들 사이로 지나가며 기이함을 느꼈다. 나의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제 아이들은 이미지로서, 박제로서, 과학적 지식과 데이터로서만 비인간 존재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은 도시과 지방의 격차와 더불어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관계를 점점 멀어져가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이화여대 자연사 박물관 전시 전경.
이화여대 자연사 박물관 전시 전경.

끝없는 질문들을 되뇌며 바누의 책을 다시금 떠올렸다. 서문 마지막에서 바누는 역사를 재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피력하는데, 아래와 같다: 

부서진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깨진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려 하기보다, 조각난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을 기리는 인식론과 미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불완전함을 기리며 온전함을 무력화시키고, “무너지고 짓밟히고 산산조각난 것”을 온전히 가치 있게 여길 수 있을까? 시간과의 풍경과 유동적인 장소의 풍경 속에서, 부분적 소속감, 비소속감, 재소속감, 그리고 확고한 비소속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역사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중적이고, 경쟁적이며, 해결되지 않은, 파편화되고, 산산조각 나고, 부분적이며, 모순된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역사가 전하는 단일한 이야기보다는, 기록 보관소를 열어 다른 질문들을 던지고 다른 이들이 답한다면, 이들 또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반드시 전해야 한다.

프롤로그 중, Botany of Empire: Plant Worlds and the Scientific Legacies of Colonialism (2024)
첨부 이미지

참고 문헌:

  • Botany of Empire: Plant Worlds and the Scientific Legacies of Colonialism (2024)
  • 이정. (2013). 식물연구는 민족적 과제? 일제 강점기 조선인 식물학자 도봉섭의 조선식물 연구. 역사와 문화,(25), 39-73.
  • Barnes, P. (2001). JAPAN’S BOTANICAL SUNRISE: PLANT EXPLORATION AROUND THE MEIJI RESTORATION.
  • Struthers Montford, K., & Taylor, C. (Eds.). (2020). Colonialism and Animality: Anti-Colonial Perspectives in Critical Animal Studies (1st ed.). Routledge. https://doi.org/10.4324/9781003013891

 

*맨 처음 이미지의 식물은 좀작살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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