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이고 생태적 기록화
때가 때인지라 자꾸만 허기지고 가라앉는 마음에 좀 명랑한 소재를 찾아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던 작은 책 <좋은 사람 도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감은 말 그대로 그림이나 사진을 모아 실물 대신 볼 수 있도록 엮은 책입니다. 사진이나 세밀화, 일러스트 등으로 담아낸 정교한 시각적 콘텐츠 덕분에 도감은 1차 기록으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생태적 변화와 역사적 의미까지 쌓아가는 기록 매체라 생각해 왔습니다.
본격적인 관심은 도감의 확장성 혹은 활용성에 놀라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자연계 생물과 무생물을 정밀하게 담는 그릇인 줄로만 알았는데, 병해충이나 야생동물 흔적 같은 이름을 단 도감이 보이더니 <구름 도감>, <눈꽃 도감> 같은 낭만적인 도감도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무기나 패션, 요괴나 크리처, 천사, 종이접기 도감도 신선했고, 칵테일이나 위스키, 브루잉처럼 술과 관련된 도감도 여럿이었습니다. 심지어 <실패 도감>도 있더군요.
<아저씨도감>과 <좋은 사람 도감>
그러다 다양한 주위 일상을 세심하고 정겹게 소개하는 일본인들의 섬세한 '도감 사랑'도 알게 됐습니다. 수채화나 일러스트로 표현한 <청소해부도감>과 <목욕탕도감>, <책방도감>과 <호텔도감> 등은 참 따뜻하고 풍부한 질감과 내용은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들보다 이른 2016년에 출간된 <아저씨도감>을 만났을 때의 유쾌함은 특히 나누고 싶습니다. 4년 동안 거리와 주위에서 만난 500여명 '아저씨'들의 생태를 관찰해 48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다음 일러스트와 사진으로 소개한 <아저씨도감>을 통해 '참 다정한 기록이구나,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와 수집이 이렇게 푹신하고 재미있게 확장될 수 있구나' 했습니다. 차츰 분류와 기술 등의 기록화 과정을 거친 도감은 현대 고고학 혹은 풍속세태 사회학으로도 불리는 고현학의 한 갈래구나 싶기도 하고, 인류학적 기록으로 해석해도 과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발간 시기가 가장 최근인 <좋은 사람 도감>은 그간의 도감과 또 다릅니다. 일상 속 특정 주제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아저씨도감>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접근 방식은 색다릅니다. 도감 분야가 넓지만 대개 물성이 있는 대상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좋은 사람'은 추상적입니다. 추진 순서나 경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사람의 다양한 감정과 감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일본 MZ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팀 '엔타쿠' 소속 3명의 기획자, 일러스트레이터, 카피라이터는 '지나치기 쉬운 일상 속 착한 행동을 포착해 감성 충만한 콘텐츠로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100명의 '착한 사람'을 수집하기로요. 그것이 2023년 '너무 착하잖아' 전시회로 이어집니다. 티켓 3만 장이 금세 동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책으로도 발간됩니다. 이듬해인 2024년 7월에는 서울에서도 전시회가 열렸다는 걸 뒤늦게 알았는데, 현재까지 누적 관람객이 30만 명이 넘었고 올해 초부터는 일본 여러 곳에서 순회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마다 숏폼 영상으로 소개돼 '핫플'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바빠도 말을 걸면 키보드 치는 손을 멈춰주는 사람... '좋은 사람' 100명을 수집하다
그럼 이들의 시선에 든 '착한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요. 마트에서 집어 들기 직전에 마감세일 스티커를 붙여주는 직원, 뒷자리 친구에게 프린트물을 넘겨줄 때 꼭 뒤돌아서 건네는 사람, 바쁠 때도 말을 걸면 일단 키보드 치는 손을 멈춰주는 선배,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이 노래하고 있을 때 핸드폰을 보지 않는 사람,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까지 보는 사람, 아이가 이야기할 때 시선을 맞춰 쪼그려 앉는 사람,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시다는 전제로 질문을 안 하는 사람,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을 때 제품 링크까지 보내주는 사람, 오래 함께 한 봉제인형을 버릴 때 가슴이 욱신거리는 사람... 아,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몸이 욱신거릴 걸 알면서도 "의자를 뒤로 젖혀도 될까요?"라고 묻지 못하는 사람도 있네요. 제가 고른 '착한 사람'들입니다. 이밖에도 제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착한 사람'이 많은데, 역시 나라와 사회, 문화의 경계를 넘어 '좋은 사람'에 대한 정서에는 공통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공감이 좀 되시는지요? 사실 <좋은 사람 도감>은 도감 중에서도 엄청 가볍고 발랄한 편입니다. 그래서 당을 충전하는 느낌이랄까요, 세상 무해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입꼬리가 싱긋이 올라갑니다. 한없이 무거운 이즈음, '좋은 사람' 이야기에 조금 가뿐해지셨으면 하는 마음 전해 봅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로 기분 좋아지는 일상, 편안하게 각종 '다정한 기록'을 기획하고 수집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발행 일정을 착각해 일주일 전에 마감을 했더니 그 사이 '격변'이 현실이 돼 소소명랑한 이야기가 다시금 송구해져버렸습니다~^^. 상식과 순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 환한 봄날을 함께 누릴 수 있어 기쁩니다. 기록공동체에도 새 기운이 넘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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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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