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25] 작은 열망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차재신입니다. 

저는 인사말 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인데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딱히 할말이 없기 때문이겠죠. 유튜브에서 ‘스몰톡 잘하는 법’이라는 영상을 보게 됐는데(제가 검색한 거 아닙니다) 영상의 핵심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화하는 그 순간에는 세상에 상대방만 존재하는 것처럼 대하라는 것이죠. 마치 사랑에 빠지라는 뜻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섬세한 팁을 줬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책 읽어요?”라고 물으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이 책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선택지를 좁혀서 대답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 책 두꺼워 보이네요”, “책은 재밌어요?”와 같이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면 질문을 받은 상대방도 대화를 받기 편한 흐름으로 이어 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영상에 재밌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그 책 두꺼워 보이네요.”

“네.”

“책은 재밌어요?”

“네.”

“...”

그렇습니다. 스몰톡도 사실 상대방이 대화할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질문을 아무리 최소화해서 던진다고 한들 상대방이 받지 않는다면 대화를 이어 나갈 수가 없죠. 갑자기 왜 스몰톡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인사말이라는 것은 스몰톡에 가까운 형식인데, 듣는 대상이 눈앞에 없으니 곤란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이 눈앞에 있었다면 “오 목걸이 색이 토파즈네요. 원래 그런 색을 좋아하세요?”나, “아이폰을 쓰시네요. 언제부터 사용하셨어요?” 등 선택지가 많았을 텐데 말이죠.

오늘도 역시 인사말이라 쓰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저희의 이번 주제는 <파도>입니다. 주제에 맞춰 이렇게 질문해야겠네요. 여러분은 바다 좋아하세요? 가장 기억에 남은 바다는 어디인가요? 바다를 별로 안 좋아한다면, 이유는 무엇인가요?

차재신

‘파도’를 주제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시다. 나는 이 시에서 ‘바다가 우리의 무엇을 영원토록 만드는 게 싫다’는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바다가 주는 느낌, 바다의 아우라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아서.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에는 영원히 간직되는 장면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감정이든, 기억이든, 생각이든 간에.

사실 나는 바다에 별 관심이 없다. 정확히는, 바다를 봐도 별 감흥이 없다. 탁 트인 느낌이 좋긴 하다만 그뿐이다. 여행에 관심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귀찮음이 커서. 그러나 바다가 들어간 시들은 좋아한다. 바다라는 거대함이 주는 이미지가 뚜렷해서 그런 걸까. 거대한 만큼 다양한 소재가 나올 수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질문이 생긴다. 바다가 나의 무엇을 영원토록 만들었을까? 생각한다. 바다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보러 가게 된다. 어렸을 때 바다는 나에게 세상의 끝이었고 조금 더 자란 후에는 자유였다. 요즘은 모르겠다. 가 봐야 알겠지. 어쨌든 바다는 그렇게 남아 있다. 바다가 나의 무엇을 영원토록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바다는 바다고 변하는 것은 나다. 어쩌면 내가 바다를 영원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주제는 파도. 파도는 영원히 반복되는 한순간 같다. 짧게 일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파도의 이미지. 이제 영원히 반복되는 순간들을 찾아봐야 한다.

연정모

더운 나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가장 첫 번째로 바다를 마주한 순간에 기사님이 알려준 사실이 있었다. 이 섬에서는 해변 가까이엔 파도가 치지 않는다고. 산호가 천연방파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 지역의 신비’ 자랑인 줄 알고 가볍게 넘겼는데, 정말 어디에서든 그 풍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육지와 맞닿은 바다에선 파도가 치지 않았다. 작은 물결들만 가만한 움직임을 보일 뿐, 위아래로 크게 넘실대거나 해변을 찰싹 때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아주 멀리서 흰 파도의 라인이 생겼다 사라지곤 했다. 누군가 여기까지만 침입을 허락한 것처럼. 대양으로부터 비롯되었을 파도는 육지 멀리 일정한 선을 만들고 그 자리에서 파스스 사라진다.

처음으로 본

파도의 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까지도 그 바다의 모습이 강렬히 남아 있다. 파도가 멀리 있음.

✴︎

공교롭게도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밤 조금 운 일이 있었다. 소소사라는 출판사이자 문학 공간에서 정연택 밴드 공연에서였다. 스스로 ‘할아버지’라고 칭한 노가수는 얼마전 가까운 이를 떠나보냈다는 이야기와 함께 공연을 시작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의 노래와 연주를 들으며 나는 왠지 무참해졌다.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그가 적어 온 노래들에는 그저 흘려들을 수는 없는 이어짐이 있었다. (그는 이 공연을 ‘기억의 방에 초대받는 일’로 소개했다. 모든 초대는 참 감격스럽다)

마지막 곡은 1977년에 발표된 ⟨젊은 연인들⟩로, 나도 알고 있는 노래였다.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누구 한 명이 흥얼거린다면 따라서 허밍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노가수는 곡에 얽힌 사연을 들려 주었다. 이 곡의 원작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도 친구들과 함께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이였는데, 오래전의 어느 연말 음악회에 출연했다고 한다. 음악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기에 무척 기뻤을 거라고. 팀은 훌륭하게 공연을 마친 후 답례로 호텔 숙박권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호텔에 묵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곳에서는 큰 화재가 발생한다.

그것이 상당한 사상자를 낸 대연각 화재 사고였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노가수와 그의 친구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함께 눈을 떠 뉴스 속보를 보게 된다. 연기가 타오르는 호텔의 전경. 친구의 형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고.

수 년 후 그 친구의 어린 동생까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대학가요제라는 게 생긴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노가수를 찾아왔다 한다. 큰형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는 요청.

이어지는 노래의 선율과 가사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가사를 첨부한다. 

고백하자면, 이 곡을 듣는 내내 속수무책으로 훌쩍이게 됐다. 

그건 (단절된 삶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노래로써 이어지는 마음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확실치는 않으나 ‘삶이 참으로… 거대하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파도가 멀리서 온다.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 힘을 그 거대함을

그 무참함을.

✴︎

실은 여행 둘째 날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 꿈을 끝내고자) 창밖으로 뛰어내렸는데, 악당도 함께 몸을 던져 내 목을 휘감았다. 추락하는 중 악당이 내 귀에 대고 악 소리를 지르던 것이 마지막 장면. 

귓속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새벽 네 시. 정말 희한하게도 악몽을 꾸다 깨면 늘 같은 시간이기에 더욱 으스스 두렵다. 호텔 방 안은 캄캄했다. 다시 잠들면 악몽이 이어질까 봐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두세 시간 지났을 즈음 해가 뜨고 엄마가 깼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 나와 동생을 살폈을 때에야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처럼.

어린 나는 집에 강도가 들까 봐, 무심천에서 정체모를 크리처가 생겨날까 봐, 엄마아빠가 어른들 저녁 모임에 다녀오는 길 사고를 당할까 봐 울었다. 이 행복이 이 사랑이 언젠가 불시에 박살날지도 몰라. 그 두려움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신체의 사이즈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열두셋까지도 엄마나 동생의 침대에서 함께 자던 것은 그 이유였다. 

큰 죽음도 상실도 겪어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삶 외연에 거대한 파도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 참 이상하다. 어느 누굴 불시에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렵채집인의 디엔에이에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뻐근한 몸과 무거운 두통을 이고 남은 여행을 이어가야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남은 날 내내 평온하기만 했다. 비이성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맑고 잔잔했다. 아래에 무엇이 사는지 훤히 비쳐 보이는 옥빛의 물.

파도로부터 안전한 섬을 원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은 아닐 것이다. 내가 여기서 목격했다. 그런 섬도 있음을. 산호와 모래가 지켜 주는 섬도 있음을. 나는 아빠가 빌린 렌터카를 타고 안전하게 삶을 구경했다. 잘 닦인 앞유리를 통하여 먼 바다를; 느긋한 산등성이를; 가지런한 일차선 도로를 구경했다. 내게 주어진 일이라곤 지도에 목적지를 설정하고 원하는 음악을 고르는 것뿐. 

솔직히 말하면 여행지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옆자리에서 세상 모르게 자는 동생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삶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는 신에 대해서도 믿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이런 기도라면 언제라도 하고 있다. 

✴︎

당연히 이곳도 낙원이라고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산호는 범선과 화약을, 전투기를 막지 못하기에 이 섬은 ‘발견’된 후 수없이 많은 침략과 학살 그리고 전쟁에 노출되어 왔다. 건물이며 도로 곳곳에서 ‘메모리얼’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섬의 주민들이 현재를 살고 미래를 이어가는 중에도 과거를 기리기로 선택했단 걸, 그것이 이 생의 중요한 할 일임을 알 수 있었다. 

몇 해 전엔 거대한 태풍이 이 섬을 강타한 일도 있다. 먼 나라에 있는 나에게도 소식이 전해질 정도로 큰 재해였다. 항공편은 물론 몽땅 결항되었고 리조트와 호텔에 고립된 한국인 관광객들이 어찌저찌 연결되어 물과 음식을 나누고 피해 현장 복구를 돕고…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 두려움이 올까 하는 두려움에 섬을 떠나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섬의 사람들은 섬에 산다. 차를 몰고 지나치는 마을마다 누군가의 생일 파티가 있는지,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풍선을 불고 삶을 축하하고 있었다. 손을 흔들면 손을 흔들어 답해 주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 아침에는 바다 위에 선 무지개를 보았다. 맑다가도 잠깐씩 비가 흩날리는 것이 이 지방의 기후인 것이야 알고 있었는데, 공중의 빛과 물이 부지불식간에 무지개를 만들어낼 줄은 몰랐다. 그랬기에 참 생명 같고 축복 같았던 것. 이 아름다움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고 다시 한 번 체험하러 오리라 마음 먹었던 것.

휴가 기간의 나는 삶을 버거워 않았다. 

그렇다고 곧 휴가가 끝난단 생각에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그저 당장의 활기를 내 몫처럼 반겼다.

과장되게 감격하지 않고.

앨비라는 이름의 개를 만난 일이나

오래된 노래가 붐붐 흘러나오는 공원관리인의 트럭 앞에서 춤을 춘 일,

호텔 세탁실의 버블검 냄새를 맡고 이상한 그리움을 느낀 일

돌아오는 네 시간의 비행 동안,

나의 일기장에는 그런 장면이 쓰였다.

거대하지 않고 사소한 삶을 바라고 있다.

일기의 말미에는 ‘작은 열망’이라는 말을 적었다.

🚶생활기

차재신: 팔의 신경이 아주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다루지 못하는 좌절감이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체험 중입니다. 어렸을 때라면 ‘오 아픈 거로 시 써야지’ 했겠지만 지금은 시고 뭐고 빨리 낫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매주마다 농구 허접이 됐다고 팀원들에게 놀림받는 중입니다. 얼른 나아서 그들에게 처참한 복수를 해 줘야 합니다. 

연정모: 오늘은 삶의 거대함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았어요. ⟨더 폴⟩을 보고 처음 떠올린 주제였는데 몇 주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비극은 언제든 삶에 들이닥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로이와 달리, 어린 알렉산드리아는 거대한 비극을 겪고도 거기에 붙들려 있지 않습니다. (그야 아이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하면 할 말이야 없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즐겁게 보지는 않았지만) ⟨미키17⟩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발견했어요.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빨간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나 (다른 미키들보다도 특히나 소심한 미키17에게) 미키18은 소리칩니다. 그건 그냥 차량 이상이었다고. 

둘 중 누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극을 대하는 태도가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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