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질 게야. 죽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는데 사람이 묻히는 땅은 뭐라고 하느냐? 그곳은 뭐라고 부르는지? 그것도 이름이 있어야 할 거야. 고향이란 말에 못지않게 정다운 말이 있어야 할 거야.”
한진, 「그 고장 이름은?...」 중에서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대학 시절 오스트리아 빈을 2 년 정도 오가며 지낸 시간을 제외하면, 평생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향을 묻는 질문에는 서울이라 답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장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는 고향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자주 휩싸입니다.
제가 태어났을 무렵, 서울은 이미 메트로폴리스였습니다. 명절이면 동네 친구들은 부모님의 고향으로 갔고, 직장 동료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고향을 찾을 때, 저의 고향은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부재로 채워진 텅 빈 공간이 되었습니다.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고향이라는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보편의 정서는 알지 못하는, 실향민 아닌 실향민이라 할까요.
막연히 아빠의 고향 충주를 저의 고향으로 삼아 보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딘가 미묘합니다. 아빠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상경하여 서울에서 60여 년의 세월을 보냈는데요. 그럼에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그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주말마다 오가던 세월로부터 귀향하여 지낸 시간이 스무 해를 훌쩍 넘겼음에도,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아빠를 ‘서울 아저씨’라 부릅니다. 아빠가 평생 그리워한 곳은 아마도 오늘의 충주가 아닌 일곱 살 이전의 충주, 이미 사라진 시간에 존재하는 장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저는 더욱 이방인일 수밖에요.
고향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태어난 곳일까요, 돌아가고 싶은 곳일까요, 그도 아니면 끝내 돌아갈 수 없기에 비로소 그리워하게 되는 곳일까요. 어쩌면 고향은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향하는 어딘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빠의 그리움이 평생 어린 시절의 충주를 향해 있었듯, 저의 그리움 또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채 어딘가를 향해 있겠지요. 오늘도 저는 태어난 자리에서, 언젠가 돌아가 머물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2 년쯤 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청으로 진행한 특강에서 변월룡(邊月龍, Пен Варлен, 1916–1990)의 삶을 주제로 한 <귀향(歸鄕)>이라는 이름의 향을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연해주 태생의 고려인 3세로, 평생 마음의 고국을 품고 살았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화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에 정체성의 뿌리를 둔 여호(餘戶, 소련에 귀화하지 않은 고려인)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소련 최고의 명문인 레핀 미술대학의 교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땅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평양미술대학의 학장으로 사회주의 미술 교육 시스템의 근간을 세우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지요.

이 시기에 문화계 고위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남긴 초상화도 몇 점 전해지는데, 잘 알려진 <김용준 초상>과 <무용가 최승희 초상>도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잠시 소련으로 돌아가 요양하던 중 그는, 귀화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북한으로부터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김일성 정권의 소련파 축출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북한에서 보낸 1년 남짓의 시간이, 그가 평생 동안 조선에서 보낸 시간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몇 번이고 연해주를 여행하며 남긴 조선 소나무 연작, 그리고 옹기 항아리를 함께 그린 어머니의 초상에 적힌 ‘어머니’라는 한글. 고국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은 작품 곳곳에 절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일생에 걸쳐 정체성의 뿌리로 삼고 사무치게 그리워한 마음의 고국 조선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기까지는 너무나도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연 하나 품지 않은 화가가 없지만, 변월룡에 대한 애잔함에는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체제와 이념이라는 허상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것인지를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귀향>은 그가 언젠가 돌아가고자 했던 땅, 그리고 그 땅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간 시간을 향으로 그려 본 작업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특강에서는 이 블렌드를 이루는 재료들을 네 개의 팔레트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연해주의 여름
고국의 들판
소나무 연작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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