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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ICUE CHRONICLE No.006 “가뭄의 유산“

2026.10.19 | 조회 49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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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SOPHIE HONG

우리가 슬픔 속에 더 고요히 머물고, 더 인내하며, 더 마음을 열어 둘수록, 새로운 것은 더욱 깊이, 더욱 흔들림 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여덟 번째 편지(1904년 8월 12일) 중에서

 

 

Olfactory Study No.009 “Viridian”

첨부 이미지

이끼 정원에서는 초여름 밤마다 축제가 열립니다. 이끼의 포자를 실어 나르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이끼 향등에 소망을 띄우고, 시트러스 과일 껍질을 품은 이끼 엘릭서를 나누어 마시고, 달빛을 머금은 이끼가 빚어내는 초록빛 소리에 몸을 맡기기도 하지요. 정원 가장 깊은 곳에는 이끼의 정령 The Ice Man이 삽니다. 그가 축제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숲을 찾는 사람들이 꿈에 빠져드는 동안 조용히 돌과 이끼 사이를 오가며 정원을 돌볼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 축제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바람이 한 달이 되어가도록 그치지 않았고,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끼에게는 물을 저장해 두는 장치가 없습니다. 잎 뒷면에서 숨구멍을 여닫는 기공도,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을 나르는 관다발도 없지요. 비가 오면 온몸으로 흠뻑 젖고, 구름이 걷히면 온몸으로 바싹 마릅니다. 생동하던 이끼 정원은 색채를 잃어갔고, 향등은 꺼져갔고, 향기도 잦아들었습니다. The Ice Man은 그해 여름 내내 말라 가는 이끼를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무력한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면서요.

그리고 마침내 비가 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치지 않고 내렸습니다. 이끼는 물을 가득 머금으며 초록빛을 되찾았고, 정원에는 다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의 축제를 다시 찾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지요. 

‘어쩌면 이끼의 정령은 비밀을 알고 있을지 몰라.’ 

무리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The Ice Man이 머무는 곳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정원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냐구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The Ice Man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지나온 것이라고.

 

며칠 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 한 편을 읽었습니다. 연구진은 이끼(Tomentypnum nitens)가 자라는 아북극의 흙을 기후 챔버로 옮겨 놓은 뒤, 폭염을 동반한 3주간의 가뭄과 1주간 다시 물을 머금는 시간을 순서대로 겪도록 하며 이끼가 발산하는 향 분자를 분석했습니다.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이끼가 내뿜는 향 분자의 총량은 90%에 이를 만큼 줄어들었고, 광합성을 통해 들이마시는 탄소보다 호흡으로 내보내는 탄소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습윤 환경이 돌아온 뒤였습니다. 향 분자의 구성에 변화가 생긴 것인데요. 가뭄 이전에 비하여 세스퀴테르펜의 비중은 줄고, 산소를 품은 향 분자의 비중은 커져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것을 가뭄이 남긴 '유산(legacy)'이라 표현했습니다. The Ice Man의 말처럼, 이끼는 그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사연을 지나온 것이었습니다.

조향사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세스퀴테르펜은 대체로 베이스 노트를 이루는 분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탄소 열다섯 개로 구성된 비교적 큰 분자라 천천히 휘발하는데, 베티버 뿌리나 패출리가 연상케 하는 촉촉이 젖은 흙내음도 이 계열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실험을 거친 이끼가 품은 산소화 분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작고 가벼워, 투명한 이미지를 발산하며 공기 중으로 속도감 있게 퍼져 나갑니다. 오랜 가뭄을 견딘 이끼는 묵직한 향을 얼마간 잃었고, 그만큼 가벼운 숨을 얻은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는 이토록 우주적인, 보편적인 것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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