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슬픔 속에 더 고요히 머물고, 더 인내하며, 더 마음을 열어 둘수록, 새로운 것은 더욱 깊이, 더욱 흔들림 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여덟 번째 편지(1904년 8월 12일) 중에서
Olfactory Study No.009 “Viridian”

며칠 전,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 한 편을 읽었습니다. 연구진은 이끼(Tomentypnum nitens)가 자라는 아북극의 흙을 기후 챔버로 옮겨 놓은 뒤, 폭염을 동반한 3주간의 가뭄과 1주간 다시 물을 머금는 시간을 순서대로 겪도록 하며 이끼가 발산하는 향 분자를 분석했습니다. 가뭄이 이어지는 동안 이끼가 내뿜는 향 분자의 총량은 90%에 이를 만큼 줄어들었고, 광합성을 통해 들이마시는 탄소보다 호흡으로 내보내는 탄소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습윤 환경이 돌아온 뒤였습니다. 향 분자의 구성에 변화가 생긴 것인데요. 가뭄 이전에 비하여 세스퀴테르펜의 비중은 줄고, 산소를 품은 향 분자의 비중은 커져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것을 가뭄이 남긴 '유산(legacy)'이라 표현했습니다. The Ice Man의 말처럼, 이끼는 그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사연을 지나온 것이었습니다.
조향사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세스퀴테르펜은 대체로 베이스 노트를 이루는 분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탄소 열다섯 개로 구성된 비교적 큰 분자라 천천히 휘발하는데, 베티버 뿌리나 패출리가 연상케 하는 촉촉이 젖은 흙내음도 이 계열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실험을 거친 이끼가 품은 산소화 분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작고 가벼워, 투명한 이미지를 발산하며 공기 중으로 속도감 있게 퍼져 나갑니다. 오랜 가뭄을 견딘 이끼는 묵직한 향을 얼마간 잃었고, 그만큼 가벼운 숨을 얻은 것입니다. 고통의 의미는 이토록 우주적인, 보편적인 것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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