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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영화 노트

혼자가 된 걸 축하해: 소마이 신지 <이사>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선명히 떠오른 유년시절을 마주하다.

2025.07.27 | 조회 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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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토요일 저녁,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주말에만 운영하고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이곳은 관이 하나 뿐이다. 찾아오기 쉽지만은 않은 곳인데도 늘 관객이 있다. 여기는 유독 사운드가 섬세하게 들려서 좋다. 돌비 애트모스 상영관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느낌적인 문제인지는 몰라도 다른 곳에서 볼때보다 대사는 물론이고 주변 앰비언스, 생활 소음들,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고 음량도 적당하다.

선명한 음향과 4k 리마스터링으로 되살아난 1993년의 영화는  90년대 초 교토의 여름날을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영화 속 여름은 기억 속 여름방학 풍경과 싱그러운 풀내음과 상쾌한 비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지나온 시절이라 모든게 예쁘고 아름답게 기억될 뿐, 실은 엄청나게 혼란스럽고 몸 어느 한 부분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했던 유년시절. ‘빨리 어른이 될게’라고 다짐했던 소녀는 지금쯤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극장에서 이 포스터도 나눠주었다
극장에서 이 포스터도 나눠주었다

교토에 사는 초등학생 렌의 여름은 매미 소리만큼이나 시끄럽다. 아빠는 집을 나가 혼자 살겠다고 하고, 엄마는 이제 내 시간은 내 거라며 지키고 싶지 않은 '2인 생활 체제 수칙'이나 정하고 앉아있다. 갈치도 제대로 못 발라먹는 아빠가 내심 마음에 걸리는 렌. 렌은 엄마보다 아빠가 더 편했던 걸로 보인다. 렌은 학교에서 부모의 이혼으로 시비를 거는 친구와 싸우고, 과학시간에 알코올 램프를 깨뜨려 불을 내고 엄마와 욕실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등 어른들이 보면 '얘가 진짜 왜 이러나' 싶은 행동을 일삼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쟤가 왜 저러지? 싶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대치, 어른들은 몰라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진 않다. 오히려 모든 인물을 인간이라면 느낄 법한 혼란스러운 감정과 시기를 겪는 인물로 동등하게 바라보려 노력한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컷을 많이 쪼개는 대신 선택한 롱테이크일 것이다.

 

포스터의 똘망똘망한 눈망울만큼이나 사랑스럽고 범상치 않은 독보적 캐릭터인 렌. 그의 당돌하고 뼈아픈의 성장 이야기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성장 영화 특유의 흔한 공식과 화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로지 '렌' 스러운 성장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잊고 지냈던 고통스러운 성장과 이별의 순간을 소마이 신지 감독 특유의 위트와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후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될 엄마와 렌이 대치하는 씬, 이어서 아빠와 지인 커플도 렌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에서 왜 그들이 헤어지기로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아빠, 엄마에서 켄이치, 나즈나로서 싸우며 렌보다도 어른답지 못하다. 쟤는 내가 임신했을 때 어땠는 줄 알아? 저 여자 진짜 성질 더럽네 하며 치고박고 싸운다. 그 모든 소란을 듣고 있을 렌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문 너머로 "왜 낳았어? 이럴 거면 왜 낳았냐고!" 날카롭게 외칠 뿐. 엄마는 그 순간 이성을 잃고 주먹으로 욕실 문을 부순다. 엄마의 손과 팔목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른다. 렌은 그 순간에도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절대 울지 않다가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았을 때. 그때야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렌은 그저 모든 게 예전처럼, 행복한 때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게 같은 반 남자친구가 적어준 '렌 행복해지기 작전'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픈 장면이다. 렌은 소리없이 울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엄마도 아빠도 다 이상해. 슬프지만 그렇게 렌은 세상에 대한 기대와 부모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흐려진다. 이 시퀀스의 끝은 렌이 아버지에게 기린 인형을 건네주는데 계단 밑으로 인형이 떨어지는 것을 로우앵글, 슬로우로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마치 한 시기가 끝난 듯.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하듯.

 

렌은 엄마에게 예전에 가족 여행을 갔던 비와 호수로 가자고 한다. 단순히 조르기만 하면 렌이 아니다. 엄마 몰래 카드를 가져가 아는 삼촌에게 졸라 호텔 예약과 기차표 예매까지 다 해버린 상태.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엄마와의 여행 또한 렌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렌은 가족과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에 갔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혼자만의 여행을 하게 된다. 불쑥 등장한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도 혼자 어디론가 가버리고, 골목을 돌아다니다 마주친 할아버지네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겨우 렌을 찾은 엄마와 마주치지만 ‘빨리 어른이 되겠‘다며 혼자 불 축제를 구경한다. 달빛에만 의지한 채 깊은 숲속을 헤매고, 겨우 내려온 호숫가에서 렌은 꿈같은 광경을 마주한다. 불을 붙인 채 다가오는 용머리 배 한척과 그것을 끌고 오는 사람들, 그리고 행복하게 물장구를 치고 있는 엄마, 아빠, 자기 자신. 렌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마도 과거의 자기 자신이었을 또다른 렌은 엄마 아빠가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자 “어디로 갔어? 나만 혼자 두지마!”라고 애절하게 소리친다. 그 모습을 보던 렌은 그들을 향해 “축하합니다!”라고 손을 흔든다. 안녕, 잘가! 하듯이 연신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는 렌. 렌과 렌은 서로 포옹을 하고 과거의 렌은 사라진다. 나만 혼자 두고 가지말라며 울부짖던 아이는 이제 없다. 이윽고 완전히 호수에 홀로 남은 렌. 혼자여도 울지 않는 아이가 되어 호숫가로 다시 걸어온다.

렌의 여름을 함께 지켜보는 동안, “축하합니다!“라고 씩씩하게 소리치는 사람은 과거의 렌이 아니라 새로운 렌이란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결국 <이사>는 혼자 남겨지는 걸 두려워하던 아이가 완전히 혼자를 받아들이며 조금은 자라난 그 사이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였다.

첨부 이미지

이대로 끝날줄만 알았는데 영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모녀를 보여준다. 렌은 전처럼 엄마와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른다. 하지만 무언가 덤덤한 눈빛에서 얼핏 어른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 위로 작문 시간 글을 발표하는 렌의 목소리가 선행되며 다음 씬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본 것은 렌의 작문 숙제 속 이야기였을까? 장난스레 민망한 듯 또 엉뚱한 표정으로 영화는 끝난다. 렌은 소풍인지 하교길인지 반 친구들과 다 같이 있다 혼자 ‘미래’로 이탈한다. 그곳에는 모두 즐겁고 안녕하다. 잠깐 사라졌다 등장하는 렌은 어느새 교복을 입고 있다. 우리는 렌의 미래를 거기까지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아마도 렌은 당당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것만 같다.

 

모든 성장이 아름답고 눈부신 것만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또 다른 내가 되어 이전의 나와 작별하기까지 치졸하고, 쪼잔하고, 토라지고 화가 나고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거쳐야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거나 변한다. 성장을 하는 동안에는 알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내가 객관적으로 보일 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장 혹은 변화를 겪는 모든 이들은 무언가와 이별하며 저마다의 아픔을 가진 채 세상과 불화한다. 

 

포스터 속 아이가 마냥 귀엽고,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궁금해 가볍게 선택했던 주말의 영화는 생각보다 복잡한 생각과 이야기들,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빨리 어른이 되어야했다. 8살 때 엄마는 영영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고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던 아빠와 어린 동생 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말없이 떠난 다음 날, 알아서 가방을 챙기고 씻고 학교에 갔다. 순간 앞으로는 이렇게 내 스스로 모든 걸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울거나 불평하거나 떼를 쓰면 아빠한테 마저 미움받을까봐, 정말 혼자 남겨질까봐 속으로 삼켰다. 오히려 덤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게 습관이 되었다.

스크린에서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렇게 제대로 울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같을 때가 있다. 어느새 혼자 있는 것이 더 익숙하지만 가끔은 사람들과의 관계나 별 것도 아닌 실수 하나에 무너져서 자책을 하기도 하니까. 왜 이렇게 난 어른스럽지 못하지? 그 의문을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조금이나마 해소가 됐다. 나는 한번도 제대로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준 적이 없었던 거다. 고통받고 아파하는 지금의 나 조차도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기는 커녕 왜 이리 나약해? 진짜 실망이다, 넌 자격이 없어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하며 상처를 준다. 아직 시행착오와 과정에 있으니 아프고 힘든 것이 당연한데도 말도 안되는 '2인 생활 수칙'같은 거나 정하는 렌의 엄마처럼 나 스스로를 대했다. 

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렌은 혼자 남겨진 ‘아이’같은 자신을 꼭 안아준다. 그리고 그 아이를 놓아준다. 나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는데. 안아주기는 커녕 못본 채하고 방치했다. 진정한 성장의 마무리는 과거의 나까지 인정하고 안아주는 것. 당당하게 미래로 향해 가는 렌은 자신의 다짐대로 빨리 '어른'이 되어있었다.

 

지치고 힘들 때, 언제나 아이나 청소년이 등장하고 '여름' '성장' 같은 키워드가 있는 일본영화를 보면 무더운 여름날 녹차 빙수 한 그릇을 먹은 것처럼 힘이 난다. 모든 게 다 괜찮고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이면서.

<스윙 걸즈>, <기쿠지로의 여름>같은 인생 영화 옆에 <이사>를 나란히 두었다.


 

<이사> Moving

소마이 신지, 1993 / 일본 / 124분 / 12세 이상 관람가

각본: 오쿠데라 사토코

출연: 타바타 토모코, 나카이 키이치, 사쿠라다 준코

 원작: 히코 타나카 소설 <두개의 집>

알라딘 상세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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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개봉된 소마이 신지의 걸작 <이사>는 2023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복원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약 8000대 1의 오디션을 뚫고 발탁된 타바타 토모코는 이 영화로 데뷔 후 67회 키네마준보, 제15회 요코하마 영화제 등에서 신인 여우상을 휩쓸었습니다. 타바타 토모코의 엉뚱하면서도 강단있는 얼굴, 천재적인 연기력은 우리나라의 김수안 배우를 떠올리게 했어요. <부산행>, <군함도> 등에서 성인 배우들만큼의 존재감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김수안 배우와 타바타 토모코가 닮았다고 느낀 건 저 뿐일까요? 

영화 <운동회> 중에서
영화 <운동회> 중에서

또한 <이사>의 각본을 쓴 오쿠데라 사토코는 이 작품으로 데뷔했는데요. 이후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 아이> 등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최애> 등 작품성 있는 드라마와 영화의 각본을 쓰는 유명 각본가가 되었습니다. 

 

📽️ <이사>를 만난 극장: MFAC 명필름 아트센터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위치: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530-20(문발동) / 극장은 토,일 주말만 운영.

<공동경비구역 JSA>, <접속>, <건축학개론> 등을 제작한 영화사 명필름이 세운 극장입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전문성이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파주 주민으로서 정말 애정하는 극장이에요. 

화질도, 음향도 세밀하게 느끼며 깊은 감동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명필름 아트센터 극장을 추천합니다!

(MFAC 카페는 평일에도 열려있어요. 커피가 아주 아주 맛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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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앤드레터

    0
    5 months 전

    시네마 카이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네요!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계속 잘 챙겨볼게요! >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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