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를 개봉 날 보러 갔다. 여전히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보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솔직히 전작들보다 더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는 순간이 마냥 행복했다. 이 영화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작품으로 나타날까. 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드는 박찬욱 감독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기어이 놓지 않고 완성해낸 것도.
열 네살 때.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처음 봤다.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저 극장과 비디오 가게를 좋아했던 나는, 우연히 비디오로 보게 된 <올드보이>로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너무도 처절하게 외로워보였다. 동시에 아름다웠다. 가슴 시리게 외롭고 쓸쓸한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다니. 영화가 끝나도 한참동안 잔상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여러 장면 중에서도 미도가 퉁퉁 부은 눈으로 지하철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도 지쳐보이는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눈물을 닦는 얼굴에서 편집되어 현재로 다시 돌아와 미도와 대수가 팔베게를 하고 눕는 데까지 그 위로 흐르는 미도의 테마 ost가 슬퍼질 때마다 떠올랐다. 왜 <올드보이>는 다른 영화를 볼 때와는 달리 끝난 후에 더 선명하고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 걸까. 저런 영화를 찍는 감독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올드보이>를 본 이후 영화감독, 특히나 박찬욱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올드보이>의 감독이 유명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사람이라고? 그 영화가 처음이 아니라 데뷔할 때는 2편이나 망한 영화의 감독이었다고? 알면 알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천재가 짠 하고 만들어낸 결과물인 줄 알았던 <올드보이>는 숱한 실패와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후 개봉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박쥐>는 <올드보이>와는 또 다른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새롭게 개봉하는 작품마다 신선하고 재밌었다. 특히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다들 너무 난해하고 이상하고 완전 재미없다고 했지만 나는 박찬욱 감독이 그려낸 사랑스럽고 엉뚱한 세계에 매료되었다. 숱한 명작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며 현업에 계신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 <올드보이>를 보고 생긴 의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영화와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거듭 느끼게 되는 건, ’박찬욱 감독’처럼 영화를 하며 살아가는 게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를 딛고 계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만으로도 정말 정말 어렵고 힘든데 그 시기를 버티고 결국엔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를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게다가 내는 작품마다 새롭고 파격적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의 그런 점 때문에 많은 영화인들이 그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이유일 것이다.
추석 연휴에 기대되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S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뉴 올드보이 박찬욱>이 그것이다. 오래 박찬욱 감독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을 품고 있던 나로서는 이 다큐를 하는 날만을 기다렸다. (지금은 다행히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총 2부작으로 구성되어있는 다큐멘터리는, 1부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여정을 따라가고 2부에서는 그의 인간 ‘박찬욱’으로서의 면모와 창작 과정을 다룬다. 더 길게 만들어줘도 되는데. 다큐멘터리의 여운이 남아 집에 있는 <올드보이> 블루레이 코멘터리와 최근 <어쩔수가없다> 홍보로 출연하신 영상과 인터뷰들, 마음산책에서 나온 산문집 『박찬욱의 몽타주』, 데뷔 30주년 기념도서 『마침내 박찬욱』도 펼쳐들었다. 다시, 처음 영화에 눈을 떠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박찬욱 감독님을 딱 한 번 마주한 적이 있다. 무려 십년 전쯤이었나, 영화 <스토커>를 보고 몇몇 씬을 분석하는 형식의 GV를 예매해서 갔었다. 감독님은 빠르게 극장 안을 빠져 나갔지만 팬들은 주차장에 모여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받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우물쭈물하던 차에 이대로 돌아서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어 사인 행렬이 사라지고 차로 돌아가려던 감독님에게 다가갔다. 주차장에는 나와 감독님 뿐이었다.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감독님 사인 부탁드려요..."라며 수줍게 갖고 있던 것 중 아무거나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걸 내밀었다. 노란색 종이 서류 봉투였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감독님은 싫은 내색없이 사인을 해주셨다. 이름을 물어보시더니 나의 이름과 본인의 사인만 간결히 남겨주셨다. 아직 패기 넘치던 이십대 초반의 영화과 학생이었던 나는, 뜬금없이 서류봉투에 들어있던 나의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감독님에게 드리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감독님 심심하실 때 봐주세요!!"하고 말이다. 나조차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론 제목은 바꼈지만 당시 시나리오 제목은 <복수>였다. 헤어진 연인에게 귀여운 복수를 하는 여자가 주인공인 내용이었다. 아마 어떻게든 내가 당신의 영화를 보고 영화의 길로 가게 되었고 그런 나를 알아주셨으면, 하는 치기어린 생각이었을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그때의 나를 말리고 싶다. 사인만 받고 가지 그냥... 감독님은 '뭐야 이거'하고 난감하셨을텐데. 언젠가는 진짜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여드릴 수 있기를.
<뉴 올드보이 박찬욱> 다큐를 보면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두 편의 영화 (<달은…해가 꾸는 꿈>, <삼인조>)가 망한 뒤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기까지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텨냈는가였다. 아무리 자신감 넘치고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두 편이나 영화가 망하고 다음 영화에 대한 투자가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포기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떤 마음이어야 그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지금과는 달리 아무도 그의 성공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큐에서도 밝혀졌듯, 특별한 방법같은 건 없었다. 역시나 일단 버티고 계속해서 시나리오 쓰기. 그 방법 뿐이었다. '박리다매’라는 창작 집단을 만들어서 5년간 13편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뭐라도 돈을 벌기 위해 일하기. 그러면서도 영화를 놓지 않기. 비디오 대여점 운영, 영화사 직원, 평론가 활동 등. 하지만 그는 절대 영화를 찍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영화를 찍고 있지 않을 뿐이지, 결코 영화를 포기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고작 몇 번 시나리오 공모전에 떨어져놓고 쉽게 포기를 떠올리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아도,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도 어김없이 다음 영화를 쓰며 기다린다. 박찬욱 감독님의 오랜 팬으로서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인내심이다. 그 인내라는 것이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며 여유와 자신감을 잃지 않는 태도일 수 있다는 것도. 설령 기다리던 순간이 오지 않아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꾸준히 만들어진 ‘박찬욱의 영화’들 덕분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간직한 채 지낼 수 있었을까 싶다. 그의 영화 제목대로 ‘어쩔수가없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보고 또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그저 나의 영화를 쓰고 만들 수 밖에.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나의 영화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도.
데뷔 30주년 기념 도서 '마침내 박찬욱'에 실린 영화 <3인조> 개봉 당시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똥폼잡지 않기, 겁나게 새롭게 하기"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철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한 이후, 다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다짐했던 신인감독 박찬욱 감독의 열정이 돋보입니다.
"지난 5년간 13편의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들락거렸다. 13편의 시나리오 중 단 한편도 영화로 만들 수 없었던 감독은 흔치 않을 것이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이 인터뷰 속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기다림 끝에, 우리는 '마침내' 그의 작품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십년 전 감독님께 받은 사인이예요.
가끔씩 이 사인을 꺼내보면서 부끄럽지 않은 시나리오를 쓰자고 다짐하곤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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