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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기다림의 장면들

기다림의 장면들 #04: 공기인형

이룰 수 없는 꿈

2025.07.20 | 조회 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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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영화가 끝나자,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내가 본 영화는 슬프고 외롭고, 쓸쓸했다. 

꿈 속에서 나는 계속 걸었다. 어두운 밤길을. 드문드문 불이 켜진 가로수 길을 지나, 천변을 지나, 어느새 인적이 드문 낯선 길에 혼자 서 있었다. 문득 불이 켜진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긴 뭐하는 곳일까 궁금해 조금씩 다가가자, 극장이었다. ‘CINEMA Cahiers’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아담한 극장 안은 고요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바둑판처럼 생긴바닥과 소파에서 정장을 입은 채 신문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본 적 없는 고전영화 포스터가 벽면에 걸려있고 그 흔한 매점조차 없는 극장. 나가려는 찰나,

“영화 보러 오셨어요?”

유리창 맨 아래 반원으로 뚫린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해버렸다.

반원 틈으로 손이 스윽 하고 나와 입장권을 내밀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하에 있는 상영관은 내부는 생각보다 컸다. 빨간색 패브릭 좌석과 새카만 벽면의 대비는 신비로운 동굴에 들어온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슨 영화가 상영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앉았다. 암전이 되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스크린 사이즈가 조정되기 시작했다. 꿀꺽, 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잠깐의 긴장감. 

스크린에 빛이 반사되며 영화가 시작됐다.

첨부 이미지

영화는 혼자 사는 중년 남자의 섹스돌, 공기 인형이 어느날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그 인형의 이름은 노조미. 노조미는 주인이 출근한 낮 동안 거리를 걸으며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세상의 온갖 것에 호기심을 가진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의 걸음걸이를 따라하기도 하고 소풍나온 아이의 손을 잡아보기도 한다. 빛에 비친 노조미의 손은 텅 비어있다. 

그녀는 우연히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가고, 거기서 일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남자는 노조미를 아르바이트 지원자로 착각해 둘은 함께 일하게 된다. 남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노조미는 사랑을 점점 깨달아간다. 

이룰 수 없는 노조미의 꿈을 그저 지켜보는 것에 마음이 아렸다. 노조미는 그 누구보다도 삶의 순간을 충실히 느끼고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왜 하필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걸까. 그리고 노조미와 마주친 그 모든 외로운 사람들. 그 마음들. “저도 텅 비어 있어요.” 라는 노조미의 말에 공원 할아버지는 “요즘은 다들 그래.”라고 말한다. 우린 모두 이룰 수 없는 혼자만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나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9년도 영화. <공기인형>을. 고등학생 시절, 한창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파일의 형태라도 영화를 구해서 보던 때. 한동안 이 영화를 보고 후유증에 시달렸던 때가 있었다. 영화는 너무 예쁘고 잔잔한데 그만큼 지독하게 외로워서, 내가 마치 노조미가 된 것처럼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때가 떠올랐다. 

30대가 된 지금, 한동안 기억에서 잊혔던 영화가 꿈 속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었지만 영화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나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면서. 

요즘 나는 마치 ‘공기 인형’처럼 힘이 없고 텅빈 것처럼 공허한 마음을 안고 지냈다. 세상의 누구와도 섞일 수 없고 배제된 기분을 느끼면서. 노조미가 실수로 넘어져 바람이 빠졌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진심을 다해 숨을 불어 넣어주어 다시 살아나는 그 장면을 십수년 전의 나는 그저 ‘신기하다’라고 볼 뿐이었다. 이제는 그 장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누군가가 진심을 다해 숨을 불어넣어 한 존재를 살리고자 하는 행위가, 그리고 그 숨이 한 존재를 가득 채워 다시 살게하는 것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처럼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인간을 유일하게 위로하는 것이 있다면 진심을 나눌 때가 아닐까. 진심을 나누고 그것이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온전함을 느낀다. 

비록 노조미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모든 순간을 대했기에 인형보다 외로운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이해했던 게 아닐까. 영화는 끝났고 꿈에서 깨어났지만 노조미의 진심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내 안을 채운다. 


Cinema cahiers : 프로그램 노트

<공기 인형> ost

<공기 인형> Air Doll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9 / 일본 / 125분 /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배두나, 이우라 아라타, 이타오 이츠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후 더 많은, 좋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저의 마음을 흔들고, 지금 봐도 여전히 아름답도록 슬픈 영화는 <공기 인형>이 아닐까 싶어요. 요즘을 살아가는 쓸쓸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토록 동화같이, 하지만 서늘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대용품'이 되어 각자만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노조미라는 이름은 '희망, 바람' 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 이름처럼 노조미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가 등장하는데요,

 요시노 히로시의 <생명은>이라는 시입니다. 노조미의 꿈이 잘 담겨있는 시 같아요. 

 

<생명은>, 요시노 히로시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듯하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곤충이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그냥 흩어져 있는 것들끼리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일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곤충의 모습을 한 다른 존재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군가를 위한 곤충이었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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