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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영화 노트

도쿄 진보초 시어터에서

야마다 요지 <무지개를 잡은 남자> 1996

2025.10.21 | 조회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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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30대 중반이 되서 처음으로 혼자 외국 여행을 왔다. 도착지는 도쿄. 온전히 쉼을 위한 여행이라기 보다는 다음주까지 마감인 브런치북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나름의 워케이션, 출장을 온 것에 가깝다. 마음은 급한데 도무지 집중은 안되고 축 늘어지기만 했다. 혼자 여행하기엔 도쿄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작년에 한번 가 봤기도 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여행과 나날> (슬럼프가 빠진 작가의 여행을 그린 미야케 쇼의 영화. 심은경이 주연을 맡았다) 도 한몫했다.

그러나 온전히 혼자서 여행을 간다는 게 의외로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익숙한 곳을 떠나 내 자신과 단둘이 있다는 게 웃기게도 어색했다. 함께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온김에 꼭 가보는 관광지를 둘러보고 쇼핑을 하며 이국의 풍경을 나누는 여행과는 아예 다른 경험이다. 같이 소소한 말을 나눌 사람도 없고 길을 헤매면 데이터와 구글맵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울적해지기도 한다. 여기까지 오는 게 맞았나?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길거리에 저런 게 있네? 저 사람은 옷을 참 특이하게 입었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등등. 생각들이 비눗방울처럼 퐁-하고 떠올랐다 사라진다. 

 

굳이 영화를 보러 도쿄까지 온 이유가 있다. 항상 여행을 오면 그 도시의 영화관을 찾곤 하는데, 도쿄에는 특히나 고전 및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미니 시어터'가 무척이나 많다. 서울에 한국영상자료원, 서울아트시네마, 에무시네마, 라이카 시네마, 시네큐브 같은 곳이 많이 분포되어있는 것과 비슷하다. 작년 봄 도쿄에 처음 갔을 때 그 중 한 곳에서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외관과 로비 정도만 구경하고 나왔다. 3박 4일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 갈 곳도 많은데 영화까지 보고 나오기에는 일정이 빠듯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로 종종 도쿄가 생각이 났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 속에 숨고 싶을 때. 여행을 가서도 영화관에서 의외의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을 때가 좋다. 여행 중인데 또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상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한글 자막 없이 봐야하기에 오로지 영화 속 장면과 상황만으로 내용을 추측해야힌다. 훔쳐보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건 여행을 하며 겪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현지 사람들의 대화와 문화, 생활을 잠깐 들여다보며 혼자 추측할 뿐. 한글 자막이 없으니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과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대사로 전달받기 어렵다. 오직 표정과 분위기만으로 내 나름대로 파악하려 노력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다보면 오히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편집과 미술, 촬영이 더 잘 보이고 결국 이미지와 사운드로 표현된 감독의 연출에 더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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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걸어서 15-20분 거리에 있는 진보초에 갔다. 각종 중고책, 만화와 옛날 잡지들, 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아우르는 영화 포스터와 스틸을 찾아볼 수 있는 책의 거리. 부산의 보수동 책방 골목을 연상시키는 이 곳에 오면 걸음이 느려진다. 보물찾기하듯 가판대에 나와있는 책과 사진, 각종 자료들에 시선이 빼앗기고 어느새 홀린듯이 디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쉽게도 책은 일본어를 잘하지 못해 읽을 수 없어 표지만 들춰보는 것으로 그치지만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알 수 없는 영화 관련 잡지와 포스터, 놀랍도록 선명한 스틸 사진들은 상태도 좋아서 이곳은 박물관 그 자체다. 폴폴 풍기는 뽀얀 먼지 냄새를 맡아가며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새 골목에 우뚝 서 있는 극장과 마주친다. ‘진보초 시어터’라는 극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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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초 시어터 입구
진보초 시어터 입구

진보초 시어터에서는 일본의 고전 영화들을 주로 상영하는 곳이지만 꽤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다. 도착했을 때는 영화 하나가 끝나고 관객들이 나오는 중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서 30분 후에 시작하는 영화를 예매했다. 찾아보니 오늘 보게 될 영화는 <남자는 괴로워>라는 일본의 국민 코미디 영화 시리즈와 관련된 기획전으로, 야마다 요지 감독의 1996년 작품 <무지개를 잡은 남자 虹をつかむ男>라는 영화였다. 입장이 시작되기 전까지 매표소에 있는 음료 자판기에서 비타민 C 음료를 뽑아 마시며 잠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하나둘 씩 관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체로 중장년층, 노인 분들이 많았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거나 일행과 속닥이며 얌전히 상영관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오후 5시 35분, 상영 10분 전이 되자 관계자분이 입장에 앞서 안내사항과 영화를 간략히 소개해주셨다. 입장은 순번대로 하고 좌석은 자유석이다. 나의 입장 번호는 15번. 원하는 자리에 선착순으로 앉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상영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도 어둡지 않고 은은한 조명을 켜두었다. 좌석 간 거리도 넓어서 다리를 쭉 펼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배경음악으로 기획전과 관련된 음악으로 보이는 엔카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이유가 있다. 훌륭한 음향과 스크린 장비들로 추억의 명화들을 매번 새로운 기획으로 만날 수 있으니까. 노인과 학생, 장애인은 티켓도 할인 받을 수 있다. 영화는 35mm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그레인과 필름 스크래치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렇다고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제대로 내용도 모르고 자막도 없지만, 간단한 일본어는 알아듣기도 했다. 비교적 친절한 영화의 문법과 주인공 배우의 코믹연기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 속 극장으로 등장하는 오데온좌
영화 속 극장으로 등장하는 오데온좌

<무지개를 잡은 남자>는 영화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오데온좌 (오데온 극장)’는 작은 마을의 유일한 극장이다. 주말마다 주민들에게 명작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세상 제일 행복한 극장 주인 카츠오 (니시다 토시유키 분)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영화 중간 중간마다 그가 실감나는 연기로 상영 예정인 영화의 한 장면(시네마천국, 에도 시대극 천구회장天狗廻)을 재현하는 모습은 영화의 백미다. <사랑은 비를 타고> 속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추는 장면을 그대로 오마주하기도 한다. 그 장면에선 극장 안에 피식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유쾌한 극장 주인 카츠오가 이렇게 열심히 명작들을 고르는 이유는 짝사랑하는 카페 사장 야에 (다나카 유코 분) 때문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의 이름은 카사블랑카다) 그녀가 ‘오늘 영화 너무 좋았어’라고 미소짓는 모습에 마냥 행복해하는 카츠오. 야에 뿐 아니라 극장에서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하게된 료(요시오카 히데타카)도 카츠오와 함께 극장을 꾸려가는 동안 소소한 성장을 한다. 딱히 꿈이 없이 방황하던 료는 영화의 마지막 즈음 오데온 좌에서 쌓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 구직활동을 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꿈을 찾은 것 같진 않지만, 뭔가 앞으로 열심히 살 것만 같다.) 나름대로 ‘일본의 시네마 천국’을 그려낸 영화였다. 영화의 말미에 가장 중요하게 보여주는 <남자는 괴로워>의 장면들은 영화가 개봉한 1996년에 타계한 주연 배우 아츠미 키요시에 대한 헌사이기도 했다. 카츠오는 료가 떠나기 전,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있다며 <남자는 괴로워>를 틀어 단 둘이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본다. 중절모를 쓴 모습 영화 속 아츠미 키요시의 모습이 이 꼭 카츠오와 닮았다. 그래서인지 아츠미 키요시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몇몇 분이 훌쩍이기도 하셨다. 

 

영화가 끝난 후 찾아보니, 이 영화는 무려 48번째 시리즈로 끝이 난 <남자는 괴로워>를 마무리하는 영화였다. 감독이 사랑하는 영화들과 <남자는 괴로워>를 사랑하는 팬, 주인공 아츠미 키요시를 위한 영화이기에 일본인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막 도쿄에 도착한 사람에게 그런 감정까지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극장 안에서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치 오데온 좌를 찾은 관객이 된 것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나도 영화와 극장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힘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야지. 


<무지개를 잡은 남자> 예고편

 

진보초 시어터 위치:

 

[ 에필로그 ]

 

 1. 

영화 속 '오데온좌'는 도쿠시마현 미마시라는, 실제로도 작고 소담한 마을에 자리잡고 있어요. 원래는 폐관을 앞두고 있었으나 이 영화가 개봉하면서 재건 및 복원이 확정되어 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답니다.

2.

일본의 국민적 영화로 대표되는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주인공 아츠미 키요시의 고향, 도쿄의 시바마타에는 극 중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만든 ‘토라상 박물관’이 있다고 해요. 시바마타라는 지역 전체가 <남자는 괴로워>를 상징하는 곳이라 아츠미 키요시의 동상, 박물관도 있어서 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성지같은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시그니처룩인 중절모에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시는 분들도 많다고 하네요. 

3.

극 중 아야를 연기한 다나카 유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의 교장 선생님 역할로 등장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 영화를 보다보면 이렇게 배우들의 젊은 모습을 만날 때 신기하고 반갑기도 합니다. 

 

오늘 레터는 자정을 넘어 화요일에 발송되었는데요... 18일 토요일에 도쿄에 도착해 진보초 시어터에서 영화를 본 후 오늘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하느라 발송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 오늘은 시부야에 있는 '분카무라 르 시네마'에서 <그랜드 투어>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혼잡하고 북적이는 시부야 한복판에서 고요한 영화관에서 독특한 영화를 만나는 기분은 색다르고 기묘했어요.

도쿄를 비롯해 그동안 여러 도시에서 방문한 극장과 영화,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주에 브런치 플랫폼에 <낯선 도시에서 영화를 만날 때>라는 제목의 '브런치북'으로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26일 일요일이 브런치북 응모 마감이더라고요ㅠㅠ 얼른 힘내서 완성해보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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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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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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