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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영화 노트

자기만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

<세계의 주인>

2025.12.02 | 조회 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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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메일이 월요일을 넘어 화요일 새벽에 도착했네요,,😥 늦게 발송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에게 <세계의 주인>은 고백하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세계의 주인>은 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에 대해 기어이 꺼내보게 하는 힘이 있어요. 영화 속 무수한 주인이처럼 더 이상 상처를 감추고만 살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조금씩 제 자신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어요. 구독자에게 <세계의 주인>은 어떤 영화였나요? 어떤 상처와 기억들이 있더라도 구독자의 세계는 소중하고 그 자체로 고유하다는 걸 꼭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단단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네요. 저의 이 메일이 영화 속 마지막 쪽지처럼 읽히길 바라며,  

 

<세계의 주인> 스틸 컷
<세계의 주인> 스틸 컷

어느 날 쪽지가 도착했다. 그 쪽지는 불현듯 나타나 감추고 싶었던,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자꾸 들춰내냈다. <세계의 주인>을 보러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에게 영화 <세계의 주인>도 그 '쪽지'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화는 그렇게 느닷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비로소 주인이가 세계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하는 영화는 영화가 끝나고 내 세계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가진 그 복잡한 세계까지도. 나에게 '세계'라는 게 있을까, 늘 타인이 이룬 멋진 세계만 부러워했던 나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세계, 즉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지 하나의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어렴풋이 떠올려보았다. 

 

남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어보이는데 내 삶엔 왜 이리 생채기가 군데군데 있어서 지저분할까. 한여름인데도 상처 자국을 덮으려 긴 소매만 입는 사람처럼 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섞일 수 있었으니까. 아무렇지 않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아무렇지 않아지기도 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아. 나는 엄마가 없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걸까? 싶은 때가 있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새벽에 일을 나가며 일찍 돌아오겠다고 말했던 엄마의 말을 아마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없다는 걸 깨닫고, 비로소 엄마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겠구나라는 걸 받아들였다.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그러나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그 순간만큼은 선명히 떠올랐다. 

 

그 후로는 뭐. 남들처럼 학교에 가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아빠가 집에 오시면 같이 티비를 보고, 그렇게 쭉쭉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다만 엄마가 없는 것 뿐. 우린 성급히 엄마의 빈 자리를 지워버렸다. 원래부터 세 명이서 살았던 것처럼. 그러다가 문득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물이 터졌다. 초대받은 생일파티에 친구의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준 음식이 있을 때, 친구 집에는 항상 은은한 피죤 냄새가 날때, 첫 월경을 겪고 생리대를 사야하는데 뭘 사야할지 모르겠을 때, 엄마없이 자란 애들은 티가 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티’때문에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했을 때. <세계의 주인>에서 유치원 선생님이 ‘결핍이 있는 사람들은 뇌가 변해버린대요’같은 어디서 들은 말을 할 때. 그 외에도 무수히 많지만 어쨌든 ‘나는 괜찮아. 엄마 없어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는데? 나 알아서 학교도 잘가고. 오히려 좋아.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내 맘대로 놀아도 아무도 잔소리 안하고. 공부하란 소리도 아무도 안 하잖아. 완전 적응했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백프로 진심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나선 ‘친정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자주 느낀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친어머니처럼 나를 사랑으로 대해 주시지만 가끔 나에게도 친정 엄마가 있다면 어떨까? 좀 더 든든할까. 아이를 임신하는 게 솔직히 겁이 나고 내키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투정도 부려보고. 내 편도 들어주고. 그랬을까. 엄마는 우리와 헤어지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세상을 떠났기에 물어볼 수 조차 없다. 아직 ‘친정 아빠’는 있지만 그는 딱히 나의 고민엔 관심이 없어 남 일처럼 말하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지병도 심해진 아빠는 본인의 몸을 챙기기에도 버겁다. 시댁에서 내가 철저히 외부인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 해체되고 각자도생을 해야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이들은 싸움 한 번 없었던 화목한 가정이었다. 나는 젓가락질이 서툴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함께 식사를 하다보면 젓가락을 다르게 쥐고 있는 건 나 뿐이다. 그럴 때 시아버지는 내 젓가락질을 교정해주려 열심히다. 아무리 가르쳐주셔도 내 젓가락질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나의 젓가락질처럼 나는 타인을 대하는 것도 참 서툰 인간이다. 가족들을 포함해 내가 늘 잘해야하는데 라는 부담감만 있을 뿐 늘 내가 실수하진 않을까, 그들이 나를 별로 달가워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속으론 나를 싫어할거야. 나는 너무나 못나고 부족한 인간이니까. 이런 생각이 거의 디폴트 설정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더듬어보면 역시나 엄마가 나를 어떤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 날 이후로 무의식에 자리 잡은 건 아닐까.

 

<세계의 주인>은 내 안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상처와 슬픔을 다시 소환한다.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고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영화를 보고 알았다. 또한 그 상처는 내 세계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의 주인이라는 것도. 최근에 겪은 가족의 죽음 이후, 장례식은 끝났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세상과 분리된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안온하고 밝은 세상에 있고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친 걸까, 내가 조금만 신경써서 사소한 연락이라도 드렸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죄책감, 얼마전까지만 해도 명절에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던 이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공허함이 종종 일상을 덮쳤다. 그 와중에도 24시간 내내 울기만 할 순 없었다. 우린 살아야하니까. 슬퍼하다가도 종종 티비를 보며 웃기도 하고, 그러다 또 한숨을 쉬고, 해야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주인이가 자신이 끝끝내 무시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내야 할 수밖에 없을 때 주인은 친구들과 더 이상 전처럼 섞이기 어려워진다. 사소한 언행이나 사과를 싫어한다는 것조차도 자신의 과거와 연결지어진다. 어쩌면 주인에게 더 두렵고 아픈 건 그렇게 분리되고 판단내려지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혼자 분리된 듯한 기분은 상처를 더 크게 벌어지게 만들고 썩어 곪게 만드다. 누구도 내가 겪은 것을 아는 이가 없는데 함부로 말하고 다 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또 다른 폭력이지 않을까. 나도 아파. 너도 아팠겠구나. 아프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이 말 한마디가 성의없는 위로보다 낫다. 진심으로 서로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는 관계에서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그 복잡하고 아픈 기억과 상처들이 없어서는 안되었다는 걸 영화를 보고 깨달았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했던 나름대로의 방법들, 선택, 태도도 곧 내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이었다. 상처와 트라우마에 대한 나의 반응, 방어기제는 곧 나의 성격이 되기도 한다. 늘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것, 못나고 부족하고 서툰 것 투성이 인간이란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조차 나였다. 그래서 밝게 웃고 리액션도 크고 착한 척도 많이 한다. 늘 우울과 무기력, 불안에 시달리는 내가 살기 위해 기댄 곳은 어릴 적부터 책과 영화였다. 책, 영화에 담긴 이야기에 몰입하는 순간이 늘 행복했다. 책과 영화는 나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언제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것 또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꿈꾸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이 거의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할만큼.

 

두려움도 겁도 많은 ‘나’는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 아무리 별 것 없고 초라해도 그건 그것대로 고유하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책임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점점 좁아지는 세계를 넓어지게 하고 깨주는 것은 역시나 ‘좋은 영화’다. 주인의 세계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나는 전보다 ‘혼자’라는 생각은 덜 하게 될 것 같다. 극장에 앉아있는 관객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기만의 ‘세계’를 끌어안고 스크린 앞에 모인다. <세계의 주인>을 본 날은 영화가 참 좋고 멋진 것이었다는 걸 다시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그 다양한 세계가 잠시 한 곳에 모여 스크린 속에 그려진 타인의 마음, 곧 세계를 들여다보고 다시 흩어진다는 것이 가히 기적처럼 느껴졌다. 각자가 품은 영화의 조각들은 어느새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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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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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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