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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영화 노트

영원히 남을, 이야기

<프랑켄슈타인>

2025.12.09 | 조회 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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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프랑켄슈타인>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았다. 극장에서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은 상황. 집에서라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틀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역시나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원작인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다 읽고 보려다 참지 못하고 영화부터 보았는데도 후회스럽지 않았다. 원작만큼이나 훌륭하고 원작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자신이 평생 단 한번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작품을 완성해낸 건 물론이고 아름다워서 눈물이날 만큼의 비주얼과 분위기로, 그 원작에 누가 되지 않을만큼 영화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기예르모 델 토로는 단순히 독특한 세계관의 비주얼만을 뽐내는 감독이 아니란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외로운 존재'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예술가였다. 

 

 <프랑켄슈타인>은 수차례 영화화 된 이야기의 고전이다. 1931년 영국의 제임스 웨일 감독이 만든 유성영화 <프랑켄슈타인> 만들어지고 난 이후 머리에 나사를 박은 누더기 얼굴의 '프랑켄슈타인'은 때론 우스꽝스럽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나타나 친숙한 캐릭터가 되었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을 만들어낸 박사의 이름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은 sf와 크리처물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으로 수많은 작품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이 이야기에 모티브를 얻은 작품은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개인적으로 자연스레 떠올린 작품은 팀 버튼의 <가위손>이다. 물론 두 작품은 전혀 다른 톤이지만 인간과 닮은 존재를 만들려 했던 박사가 등장한다는 점,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사랑하는 존재를 만난다는 점, 결국 창조된 괴물은 영원히 혼자 남는다는 점에서 <가위손>은  『프랑켄슈타인』이 낳은 또다른 창조물이었다.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꽁꽁 얼어붙은 바다에 정박한 배 한척과 선장, 선원이 등장하며 시작한다. 그들은 북극으로 향하는 중이다. 굶주림과 끝없이 이어진 작업에 지친 선원들은 오로지 북극에 가야한다는 목표 하나를 바라보며 망치로 얼음을 깨부수고 있다. 그러던 중 저 멀리 불길을 발견하고 그 불을 따라간 선장과 선원들은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의족을 하고 있다. 곧이어 그를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괴물'(크리처)의 존재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급박하게 흘러간다. 간신히 괴물을 갑판에서 밀어내며 남자는 선장실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시절부터, 저 엄청난 괴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선장과 관객인 우리는 그 이야기에 서서히 빠져 든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시 괴물이 돌아와 자신의 입장을 펼치며 한번 더 반전된다. 괴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말을 이렇게 잘 하게 되었는지 그가 겪어온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빅터의 이야기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이 이름도 없는 존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뜨겁고 무거운 눈물. 원초적인 눈물이었다. 특히 엔딩 장면은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을만큼 눈부시게 아름답고, 서글펐다.

 

<프랑켄슈타인> 속 한 장면
<프랑켄슈타인> 속 한 장면

우리도 빅터가 창조해낸 '크리처'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다. 태어남의 이유와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왔고 누구인가하는 의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알아줄 단 한 명의 동반자를 찾아 나선다. 크리처는 기꺼이 곁을 내어준 이와 영영 이별을 맞이하고, 살이 찢어지고 다시 되살아나는 고통을 간신히 참아내며 자신을 창조해낸 빅터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는 한 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존재에게 처참한 영혼의 상처를 입는다. 빅터를 끝까지 쫓아가지만 그는 죽어가고 있다. 크리처는 언제나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 운명을 자신에게 부여해준 이는 야속하게도 또 먼저 떠난다. 얼어붙은 바다 때문에 정박해야했던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크리처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에 홀로 남겨진 크리처는 햇살을 받으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의 표정에서 경이로운 슬픔을 보았다. 삶의 고통까지 끌어안는 한 '인간'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름답고도 쓸쓸한 영화를 보면서 영혼 깊은 곳까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인간은 세상과 동떨어지고 격리된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거나 교감을 하는 존재인 '친구'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괴물' 취급 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이가 늘 곁에 존재할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이야기를 읽거나 보거나 들음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는다. 

 

크리처가 눈 먼 노인의 집에서 잠시나마 함께 지낼 때, 태초의 이야기를 처음 읽는다.  

 

"그때 처음으로 이야기를 읽었는데 세상의 첫 번째 이야기였지.

아담이라는 남자와 이브라는 여자가 첫 번째 동산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

여러 도시의 경쟁과 무너진 탑.

신의 노여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용을 무찌른 남자들과 모든 걸 잃은 남자들의 이야기도 읽었어."

 

그 무수한 이야기들 속에서 크리처는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서서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꿈을 꾸고, 머릿 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따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공포스러운 진실과 마주하게 되지만 그가 만약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이제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이 살아온 날들과 모든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어가는 창조자 앞에서 크리처는 말한다.

 

"당신의 시간은 다했어, 창조자. 사그라들겠지. 모든 건 그저 한순간이야. 

내 탄생, 내 슬픔. 당신의 상실. 난 벌을 받지도 용서받지도 않겠지.

내가 품었던 희망도 분노도 다 무의미 해. 

날 데려온 밀물이 썰물이 되어 당신을 데려가네. 나만 덩그러니 남기고."

 

마지막 순간에 창조자 빅터는 크리처를 '아들'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네게 주어진 것은 살아가는 것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빅터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그 말이 필요해서 크리처는 빅터를 끝까지 쫓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주어진 유일한 과업. 모두가 내 곁을 떠나가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곁에 남는다. 마지막에 떠오르는 바이런 경의 말처럼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이제야 자신이 누군지 깨달은 자의 자유로움과 동시에 쓸쓸히 남겨진 자를 유일하게 비추고 있는 것은 태양 뿐이다. 

 

이제는 <프랑켄슈타인>이 또 하나의 '이야기'로 남았다. 고독한 인간은 또 다른 고독 속에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해 이야기를 짓는다. 그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이 되기도 한다. 나도 당신의 외로움을 알아요. 라고 손내밀어 주는 작품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전해진다. 세상 모든 외로운 '크리처'들을 위하여,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위한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 보지 못한 영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사실이 못내 위안이 되는 밤이다. 언젠가 극장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꼭 볼 수 있는 날도 왔으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놓친 것이 너무 아쉽다!)

 

그들이 이야기의 주인공 (Protagonist)이 되는 이유는 바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무가치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힘은 이야기 내부에 응축되어 있는 만큼,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구독자님의 곁을 지켜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새삼 이 글을 쓰며 이야기 덕분에 지금까지 버티며 지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댜. 구독자님어떨 때 이야기의 힘을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책이나 영화,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 짧은 문장, 무엇이든 이야기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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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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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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