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목요일부터 9.21 일요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월요일인 오늘은 영화를 보지 않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며 쉬었다. 역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집으로 향하며 이 글을 쓴다.
목요일 오전부터 영화를 보기 위하여 ktx 막차를 타고 새벽에 부모님댁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부모님은 여행 중이셔서 집엔 아무도 없었다. 영화제의 첫날, 오전 10시부터 볼 영화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금요일에 열리는 정서경 작가의 북토크에 가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는데 영화제 시간표를 보다보니 이것도 보고싶고 저것도 보고 싶어졌다. 이번에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4k 복원된 버전이었고 또 볼 수 있는 기회가 언제일지 몰라 수요일 밤에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급하게 예매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부산에 도착해있었고 나는 내일 아침 8시에는 일어나서 센텀시티 영화의 전당으로 가야했다.
영화가 끝난 뒤, 전날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선택한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제의 첫 날 첫번째로 보는 게 어울렸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지만 삶이 영화에 먹혀버린 병석 (최민수 분), 영화감독이 되었지만 현실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는 명길 (독고영재 분)의 이야기는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와닿는 지점이 많았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뭘까, 영화를 만드려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할까라는 답이 없는 고민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분명한 것은, 삶은 삶이고 영화는 영화라는 사실은 잊지 말 것. 현실이 비참하더라도 영화로 도피하지 말고 직면하려는 용기는 필요하다는 것.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상영관을 나왔다. 영화의 전당 앞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지고 각자 선택한 영화를 보러 분주히 움직였다.
매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간 것은 아니다. 2009년, 2010년, 2015년, 2019년 이렇게 네 번이 전부다. 갈 때마다 즐거웠던 영화제는 어느새 단순히 즐길 수만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영화 일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영화를 보러 영화제에 가진 않았다. 솔직히 선정된 영화들과 감독들에 대한 질투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언젠가 내가 참여한 작품이 초청되거나 감독으로서가 아니라 관객으로 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2019년 본가에 내려간 김에 한 편 정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코로나가 터지면서 영화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멀어져갔다. 그렇게 된 데에는 위축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컸다. 가서 뭐해. 가봤자 초라해질 뿐이야.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혹시나 지나가다 애매하게 아는 사이라도 만나면? 요즘 뭐해? 라는 질문이라도 들을까봐 두려웠다. 간간히 편집팀 알바를 하거나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서. 그마저도 잘 해내지 못하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닐 것 같은. 영화제는 이미 어엿한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만의 축제처럼 느껴졌다. 이번에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계속 움츠러있기보단, 궁금하고 보고싶은 것은 피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위축되고 숨고 싶은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가길 아주 잘했다. 영화제에서 고른 영화들과 거기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계속해서 영화를 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나에게 영화와 극장은 어떤 의미인지. 쉽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끝없이 고민되는 것들. 그것에 대해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나 원하는 무리에 끼지 못하고 배제된 상태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나 혼자만의 걱정과 불안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젝트 30>에 참여한 감독 중 한 명인 동기를 만나 함께 영상원 동문 행사에 갔다. 나는 영화제에 초청받아서 간 것도 아닌데 가도 될지 고민하다 동기 언니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같이 갔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반가운 얼굴들과 새로운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장해제된 밝은 얼굴로 환대해주었고 나도 그들을 보자마자 떨림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다시 즐겁게 학교를 다닐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뵙는 교수님들도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굳이 나의 근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고 그저 무조건 잘될 거라고, 잘할 거라고 해주었다.
용기를 내서 당일 북토크에서 뵈었던 정서경 작가님에게도 인사를 하러 다가갔다. 나는 북토크에서 영영 데뷔를 하지 못할까봐 불안할 때는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작가님은 자신도 많이 떨어졌었다고, 하지만 공모전 당선을 목적으로 글을 쓴 적은 없었다고 하셨다. 공모전 되려고 시나리오 쓰는 거 아니지 않나, 오로지 쓰는 것이 가능하게끔 생활을 만들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 말씀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그 말씀을 기억하며 열심히 써보겠다고 했더니 작가님은 환한 미소로 응원한다는 말씀 한 마디를 건네주셨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직접 표현하진 않았지만, 유독 요즘 힘든 영화계에서 함께 버텨내보자는 묵묵한 응원의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운대 바다 앞을 잠깐 걸었다. 정확히 15년 전에도 똑같은 곳을 걸은 적이 있다. 스무살에 합격한 대학을 자퇴하고 영상원을 가고싶어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던 시기에 그곳을 걸을 때는 오로지 혼자였다. 주변의 친구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거기 합격하기 쉬운 줄 아냐며 무모하다고 비난만 했던 친구와 손절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도 진짜로 영상원에 합격하게 될 줄은 몰랐고 졸업을 하더라도 여전히 막막할 거라는 건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여전히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르겠고, 나의 부족함만을 떠올리며 자책하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막상 오랜만에 영화제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영감을 주는 영화를 보다보니 그런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불안해할 것도, 초조할 것도 없었다. 일단 묵묵히 할 것을 하자! 라고 움직일 힘을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도 순수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계속 글을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꽤 단단한 사람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또한 나에게도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 좋을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버티는 것도 재능이라면 말이다.
하루에 많으면 두 세편 영화를 보면서 밥을 먹기 애매해 끼니는 겨우 햄버거나 삼각김밥, 커피와 도넛으로 해결했다. 그래도 마냥 즐겁고 힘들지 않았다. 수많은 영화 속을 거닐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들고 간 노트에는 GV에서 들었던 주옥같은 말들과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빼곡하다. 언젠가 이 메모가 영화가 되어 함께 영화제에 올 수 있을까? 부산국제영화제는 언제나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깨끗한 마음이 되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작품
-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정지영
- <미스터 김, 영화관에 가다> 김동호
- <르누아르> 하야카와 치에
-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짐 자무쉬
- <여행과 나날> 미야케 쇼
- 책 ‘나의 첫 시나리오‘ 정서경 작가 북토크
- <사바하> 마스터톡(코멘터리 토크)
- <프로젝트 30> 김홍준, 황슬기, 윤가은, 남궁선 외
- <오즈 야스지로의 일기> 대니얼 라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온 후 올라가는 기차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세이레터를 썼어요. 쓰고 정리하다보니 어느새 화요일 새벽이…ㅠ 메일이 조금 늦은 점 죄송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6일을 폐막으로 며칠 더 남아있는데요! 이번주에는 무려 양조위가 부산을 찾는다고 하네요 🫢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이었어요. 이번에 부산으로 영화제로 여행을 떠난 저의 마음과 겹치는 부분도 많았고, 영상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이번 하반기에 개봉예정이라고 하니 꼭 극장에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구독자님도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영화로 가득한 부산에서 새로운 마음과 영감을 발견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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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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