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상영작 📽️
<스탠바이, 웬디> Please Stand by
벤 르윈, 2017 / 미국 / 92분 / 전체관람가
출연: 다코다 패닝, 토니 콜렛, 앨리스 이브
볼 수 있는 OTT 플랫폼: 왓챠 / 웨이브 / 티빙
텅 비어있는 백지에 한 글자씩, 한 문장씩 써내려가는 것은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걷는 일과 비슷하다. 묵묵히 한 발자국 씩 내딛는 것 외에는 목적지까지 갈 방도가 없듯, 글을 쓰는 일도 머릿 속 생각 혹은 이미지를 언어로 변환해 하나씩 옮겨적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 과정도 물론 힘들지만 더 막막할 때는 다 쓴 글이 어디로도 도달하지 못할 때다. 누군가가 읽어주어야만 그 글은 혼잣말이 아니게 된다. 완성된 글이 어딘가에 당도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글을 쓰고 완성하기 위해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러 번 공모전에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글을 완성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세상 밖으로 그 글을 꺼내고자 하는 용기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우 용기를 내 공모전에 보낸 글은 수많은 제출작들 사이에 묻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당선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마감 기한에 맞춰 어떻게든 다 써서 ‘제출’을 한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위로할 뿐. 그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나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대체 언제까지 이걸 반복해야할지는 나에게 달려있었다. 새로운 것을 구상해야 했음에도 어차피 난 안 될거야. 또 떨어지겠지. 라는 생각부터 들어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이 빠졌다.
글을 쓰다 그 글을 세상 밖에 꺼내기 두려웠던 때에 <스탠바이, 웬디>를 봤다. 스타트렉 시리즈의 시나리오 공모전에 직접 원고를 제출하러 떠난다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주인공 웬디는 단순한 작가지망생이 아니다. 요일마다 정해진 색깔의 스웨터를 입어야하고, 사람들과 눈을 잘 못 마주치고,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나 낯선 상황에 놓이면 호흡에도 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런 웬디가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은 시나리오를 쓰는 것. 대사를 외울 정도로 좋아하는 TV 시리즈 스타트렉의 팬인 웬디는 스타트렉의 세계관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쓴다. 공모전이 일주일 남았다는 광고를 보고 마감 날짜에 맞춰 시나리오를 완성한 웬디. 제출만 하면 되는데, 그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너무 늦었다고 절망하던 웬디는 자신이 직접 LA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제출하러 가기로 마음 먹는다. 웬디로서는 아주 큰 용기와 결심이다. 혼자 생활이 어려워 특수학교 겸 재활센터에서 지내야하는 웬디가 고정적인 장소와 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해보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에 있는 파라마운트 픽처스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는 것은 웬디에겐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이틀에 걸친 여정에서 웬디는 돈을 뺏기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버스터미널 앞에서 노숙을 한다. 중간에는 제출해야할 원고가 흩날려 일부가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포기해버릴수도 있는 상황에서 웬디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 속 대사였다.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 이 대사를 보고 웬디는 어떻게든 LA에 도착하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고 잃어버린 부분을 다시 복기하며 펜을 들고 이면지에 시나리오를 옮겨 쓴다. 밤에는 문을 닫는 버스터미널 앞에서 노숙을 할 때 그 차가운 밤을 버티는 웬디의 마음을 떠올렸다. 웬디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긴 밤이 지나가길 기다렸을까. 언니와 조카와 함께 지내고 싶어하는 웬디에게 넌 혼자 지낼 수도 없고, 더군다나 아이는 돌볼 수 없다고 웬디를 거부한 언니의 말과 스타트렉에서 좋아하는 장면과 시나리오 속 한 부분을 떠올리면서 추운 밤을 버텼을 것이다. 오로지 전진하기로 했으니까.
불가능해보였던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웬디에게 기적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모전에 당선되어 거액의 상금을 받는 일도, 사람들의 눈을 자연스레 쳐다보며 대화하는 일도 없었다. 웬디는 웬디 그대로이지만 달라진 것은 있다. 웬디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가능성을 발견했고, 조카를 안아주는 든든한 이모가 되었고, 당선작 발표 날 응답을 받았다. 이야기 쓰기를 멈추지 말고 훗날 다른 작품으로 만나길 바란다는 말. 그 한 마디가 또 웬디를 ‘전진’하게 할 것이다.
우편으로 도착한 것이 아니라면 받지 않는다는 직원의 말에 참아오던 웬디의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뭘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수없이 생각하고 구상하고 쓴 걸 또 다시 써서 남에게 읽힌다는 게? 생각하느라 보낸 낮과 밤이 얼만데요? 딱 맞는 단어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느라? 쓴 사람에겐 너무 큰 의미가 있으니까. 저 많은 사람들 시나리오는 누군가 읽을 테죠. 저도 그런 기회만 달라구요.”
수많은 ‘안 됨’을 뚫고 웬디는 결국 시나리오를 제출에 성공한다. 메모장에 ‘완료 (Done)’이라고 적는 순간의 쾌감이란. 웬디가 진짜 작가처럼 보였던 순간은 마감을 끝내고 기어코 제출했을 때 세상 홀가분한 표정으로 걸어나왔을 때였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자 오직 뚜벅뚜벅 길을 걷는 사람이다. 외로워도 막막해도 꿋꿋이 걸어가는 사람. 웬디가 묵묵히 써내려갔던 이야기에는 혼자 황량한 사막을 걷는 사람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듯이. 기다림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낼 때 비로소 작가가 된다. 어디로 어떻게 결말(목적지)에 도달할 지는 쓰기 (걷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까.
오늘도 관객이 올지 알 수 없지만 극장 문을 열어둔다. 늦은 밤, 글이 써지지 않아 괴로운 이가 극장을 찾아와 <스탠바이, 웬디>와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극장을 나설 때, 그가 조금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관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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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
처음 알게된 영화인데 보고싶어졌어요. 좋은 영화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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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글 쓰는 사람, 아무 것도 없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 사람.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맘일거란 생각이 들어요. 흔들리지 않고, 포기 하지 않고, 계속 '한 자라도 쓰겠어'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 또 누군가에게 닿게 해야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쉽지않지만, 우리 마음에 그 생각이 이미 찾아와서 자리를 잡은 걸 어떡하겠어요...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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