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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기다림의 장면들

기다림의 장면들 #8 : 천국보다 낯선

잠들지 못하는 여행자를 기다리며

2025.11.24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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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오늘의 상영작 📽️

 

첨부 이미지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 1984 / 미국 / 89분 / 15세 관람가

출연: 존 루리, 에스터 벌린트, 리차드 에드슨 

시청 가능 플랫폼: 웨이브

 

한 여자가 짐 가방과 휴대용 라디오를 들고 휑한 거리를 걷고 있다. 라디오에선 절규와 익살이 섞인 이상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여자의 이름은 에바(에스터 벌린트). 그녀는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해 사촌 윌리(존 루리)의 집으로 향한다. 에바는 그곳에서 머물며 그의 친구 에디(리차드 에드슨)를 만나고 셋은 서로를 알아간다. 영화는 그들의 궤적을 천천히 따라간다. 뉴욕 윌리의 집에서, 1년 후 에바가 사는 클리브랜드로, 그리고 플로리다로. 


농담같은 우연이 모여 영화가 되다.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 우리는 상상한다. 그곳에서 펼쳐질 낭만적인 풍경 혹은 새로운 만남들을. 슬프게도 어떤 것을 상상하더라도 그것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천국보다 낯선>을 보는 경험도 그와 비슷했다. 영화는 영화를 볼 때 흔히 예상하는 플롯이나 형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중간 중간 암전이 등장하고 단편 영화 세 편을 묶은 듯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캐릭터들에 대한 배경이나 전사는 알 수 없다. 로드무비에 가깝지만 그들에게 험난한 모험이나 스펙터클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등장인물인 윌리 (존 루리), 에바 (에스터 벌린트), 에디 (리차드 에드슨)는 그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뿐이다.

 

영화는 그들의 작고 사소한 욕망을 충실히 따라가기로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뉴욕으로 온 에바가 사촌 윌리의 집에 열흘 간 묵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첫번째 파트는 ‘신세계’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소박한 일상의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씬은 윌리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에바는 조금씩 윌리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해나간다.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대신 주로 ‘TV 디너’라는 간편식을 먹고 카드 게임을 하고, 티비를 보고, 진공 청소기를 뉴욕에서는 ‘악어 목 조르기’라고 부른다며 농담을 하고. 그렇게 집에서 별 것 아닌 하루를 보내는 에바와 윌리를 흑백 화면의 고정된 쇼트로 담담히 보여 주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신세계‘라는 제목이 우습게도 에바가 뉴욕에서 보내는 하루는 익숙하고 지루하다. 

에바와 윌리
에바와 윌리

아무리 짧은 영화라도 컬러도 아닌 흑백, 한정된 장소, 최대 세 인물이 나누는 단순한 대사들만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과감한 선택이다. 처음부터 대단한 걸 만들어내려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형식을 추구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을 담아내고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서사 안에 블랙유머를 녹여내는 그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애초에 짐 자무쉬는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장편 영화를 만들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짐 자무쉬 감독 이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사물의 상태>의 조감독으로 참여한 것으로, 뜻밖에도 빔 벤더스 감독으로부터 3-40분 정도의 분량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자투리 흑백 필름을 지원받았고 그것이 단편 <신세계>를 찍게 된 계기가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에 몸을 맡긴 결과 <신세계>는 호평을 받고 벌어들인 수익과 투자 및 지원으로 나머지 파트 ‘1년 후’와 ‘천국’을 완성한다. 그것이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장편 영화가 되었다. <천국보다 낯선>이 영화의 흐름처럼 인생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우연과 흘러가는 상황이 이어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짐 자무쉬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의 영화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하지 않은 여행자들

<천국보다 낯선>을 촬영 중인 짐 자무쉬 감독
<천국보다 낯선>을 촬영 중인 짐 자무쉬 감독

<천국보다 낯선>의 인물들도 이 영화를 만들었던 짐 자무쉬의 태도를 닮았다. 그들은 의도된 플롯에 의해 움직이기보다 우연한 만남과 즉흥적 결정으로 부유한다. 어딘가에 정착하기 보다 계속해서 어딘가로 떠나고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윌리와 에디는 포커나 경마로 돈을 따며 생활한다. 어느 날은 많은 돈을 딸 수도 있지만 어떤 날엔 가진 돈을 몽땅 잃을 수도 있는, 당장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낸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천국’같은 곳을 꿈꾸면서도 주어진 현실과 풍경 속에서 위트를 잃지 않는 몽상가들. 그들에게 부유하는 삶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영화는 두번째 파트인 ‘1년 후’부터 한층 더 로드무비에 가까운 형태로 전개된다. 그들의 목적지는 ‘1년 후'에서는 클리블랜드, ‘천국’에서는 플로리다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모든 장소는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흑백의 황량한 풍경으로만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카메라는 그 마음을 따라 이동하는 인물들을 서두름없이 관찰하고 기록하는데 충실하다. 본격적인 로드 무비의 내용을 취하지만 첫번째 파트에서 보였던 극도의 미니멀한 형식을 바꾸지 않은 채, 마치 똑같은 속도로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 같이 영화는 달려나간다. 너무 빨리 달리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뭉개질세라 짐 자무쉬 감독은 속도를 쉬이 높이지 않는다. 천천히 달려나가는 영화 속에서 우리는 인물들의 표정을 똑바로,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마이애미 비치, 비키니 입은 소녀들, 야자수를 떠올리며 꿈만 같은 여행을 바라는 세 사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여전히 화면은 흑백이고 청량하고 푸른 해변은 등장하지 않는다. 삶이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데도 무모하게 여행을 나선 그들을 비웃듯이. 에바의 눈은 늘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하다. 낯선 곳에 가길 주저하지 않는 에바는 덤덤해보이지만 강하고 용감하다. 에바와 윌리, 에디는 또 다른 낯선 천국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을 것만 같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괜히 심각해지지 않는다. 외롭지만 불안하지 않다. 유머가 섞여있지만 우습지 않다. 짐 자무쉬 감독은 영화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기꺼이 즐기는 여행자처럼 보인다. 그의 태도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세 젊은이의 여정이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도 묵묵히 자신만의 여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천국보다 낯선>을 내내 채우고 있는 흑백의 미장센은 인물들의 무표정한 얼굴처럼 슴슴하다. 당장 내일이 불안할 만한 상황임에도 카메라는 조금의 떨림도, 현란한 움직임도 없이 한 자리에 서서 지그시 흘러가는 시간들을 담아낸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이야기와 가만히 응시하는 묵묵한 시선. 무심한 척 하지만 그 시선에서 짐 자무쉬의 확고한 태도가 드러난다. 삶과 영화의 불확실성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종종 불안함에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천국보다 낯선>을 틀어둔다. 가만히 우연에 몸을 맡기다 보면 불안을 잠시 잊고 어느새 스르륵 잠에 들곤 한다. 

 

저벅저벅. 상영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날씨를 잘못 예측한 듯 얇은 코트 한 겹만 입은 여행자가 썰렁한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한 손엔 커다란 트렁크 가방, 한 손엔 라디오를 들고 있다. 그는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찬찬히 둘러본다. 그의 눈빛은 에바를 닮았다. 

"<천국보다 낯선> 한 장 드릴까요?"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이 곳이 '낯선 천국'이 되기를 바라며 표를 내민다. 부디 영화가 끝나면 시작될 그의 여행이 불안하지 않기를.


영화가 끝난 후 📮

 

 

<천국보다 낯선>의 초반 (part 1. New World): 에바가 뉴욕을 처음 도착했을 때.

1. 에세이의 배경이 되는 극장 '시네마 카이에'를 처음 구상했을 때 저는 <천국보다 낯선>의 이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휑하고 쓸쓸한 어쩌면 을씨년스러운 거리에 혼자 불을 밝힌 채 관객을 기다리는 극장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만의 속도대로 낯선 거리를 걷는 에바처럼 저도 글을 읽고 쓰고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새로운 세계'에 당도하길 기대하면서요. 그래서 저에게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은 꼭 '기다림의 장면들'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영화입니다.

 

 

2. <천국보다 낯선>을 찍을 당시를 담은 8mm 메이킹 영상에 음악을 입혀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보았어요! 

원본 영상에는 사운드가 없습니다. 영상을 보다보니 어울리는 음악에 맞춰 편집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에세이레터를 읽어주시는 분들께 무언가 보여드릴게 없을까하다 즉흥적으로 만들어보았어요.

영상 속 짐 자무쉬와 배우들, 스탭들은 과정을 즐기며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춥고 궂은 날씨에도, 비싸고 좋은 장비가 없어도요. 마치 영화 현장이기보다 찍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모습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영화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미래를 불안해하기보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에 어쩐지 위로를 받았어요. 결국 오래 오래 기억될 멋진 영화를 만든 그들처럼,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유연하게 나아가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용한 음악은 Daniel Martin Moore의 'The Hour of Sleep'라는 노래입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나 불안들로 잠이 오지 않는 밤.

이 영상을 보는 시간이나마 잠시 흐름에 몸을 맡겨보세요.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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