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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기다림의 장면들

기다림의 장면들 #05: 페인 앤 글로리

창작의 고통 끝에 '영광'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2025.08.25 | 조회 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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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에 빠져 나 자신을 비하하곤 했다. 도저히 글이 써지지가 않았고 애써 기운을 내서 완성한 것들은 어디에서도 응답을 받지 못했다. 고작 나는 작가가 되길 원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벌써부터 괴로움을 느꼈다. 응답받지 못하고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것 같을 때, 이 극장을 열었다. 누군가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를 틀어둔 채. 

 

최근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페인 앤 글로리>를 보았다. 무려 19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1949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감독은 2019년에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극 중 감독의 이름은 ‘살바도르 말로’지만 누가 봐도 그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자신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디까지가 ’페드로’나  ‘살바도르’의 이야기인지는 본인만이 정확히 알겠지만,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의 과정과 성공한 이후 전세계를 돌며 학교에선 배우지 못한 지리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전세계적으로 성공한 감독이기에 살바도르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리학 외에도, 살바도르는 각종 통증과 병을 앓으며 해부학과 의학에 대한 지식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좌골신경통, 이명, 천식, 우울증, 불면증 등등. 몸이 주는 신호는 그것의 존재와 위치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렇게 그는 (페드로이자 살바도르) 자신의 경험에서 모든 것을 깨닫고 배우는 사람이다. 

요즘 살바도르는 작품을 찍고 있지 않다. 영화를 찍지 않으면 괴롭다고 말하지만, 최근 들어 심해진 등의 통증과 저하된 체력으로 인해 쉽게 영화 제작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0년만에  <맛>이라는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받아 시네마테크에서 재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것을 계기로 <맛>에 출연했던 배우 알베르토와 만나게 되는데 알베르토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헤로인을 하게 되고, 그 후 살바도르는 통증을 잊기 위해 헤로인에 자주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몽롱한 기분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관객은 그의 어린 시절로 함께 들어가 그가 통증과 창작의 괴로움을 알기 전의 모습을 본다.

 

<페인 앤 글로리> 속 어린 살바도르
<페인 앤 글로리> 속 어린 살바도르

모두에겐 어린 시절이 있다. 그때는 우리가 무엇이 될지 나는 물론이고 부모님조차 알지 못한다. <페인 앤 글로리>는 자신만 간직하고 있었을 어떤 기억들을 꺼내며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담담하고 솔직한 고백을 정리해가는 영화다. 영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약을 복용하고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씬이다. 49년생이라는 감독의 나이를 감안해서 그것은 그의 현재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약해지고 노쇠한 모습을 영화 속에 드러내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질환을 앓고 있는지 (그게 페드로 자기 자신의 병이 아니라 살바도르의 병일지라도) 많은 관객 앞에서 공개하기란 솔직해질 수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았을까.

살바도르는 영화를 찍지 못하는 기간에 약을 먹고, 병원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전 책을 읽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바탕화면 가득 어지럽게 펼쳐져있는 문서가 그것을 말해준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약에 취해 있는 틈을 타, 그의 컴퓨터 속 워드 파일을 몰래 열어보고 감명을 받는다. 어린 시절 첫 영화에 대한 기억,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등 내밀한 고백을 이어가는 에세이를 읽고 알베르토는 이 글로 낭독극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대신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임을 숨긴 채 만드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제안을 수락한다. 그렇게 살바도르가 잊기 위해 썼던 에세이는 무대 위에서 음악과 사진, 알베르토의 낭독에 의해 혼자만의 기억에서 모두의 기억이 된다. 

이후 영화는 살바도르가 과거의 삶이 현재로 돌아오는 기적적인 순간을 맞이하며 새로운 영화적 영감을 되찾는 과정을 담는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돋는 어떤 순간이었다. 

살바도르는 억지로 과거를 다시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흘러가는대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며 창작을 하지 못하는 고통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시간이 분명 헛된 시간이었다고 자조할 수도 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하루하루 늙어가는 육신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살바도르는 고통으로 괴로운 밤에는 컴퓨터를 켜 떠오르는 기억을 휘갈겨 써보기도 하고 자기 전에 책이라도 읽으면서 그 시간을 버텼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니까. 그러다 선물처럼 살바도르는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첫번째 열망’의 순간과 마주한다. 

아무 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 창작자로서 자신은 이렇게 살아왔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이 영화에 깊은 위로를 받았던 이유는 결국 괴로운 이 시간도 지나가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이 고통인 시간을 겪다 잠시 주어지는 영광의 시간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창작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삶이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에서 언젠가 찾아올 영광을 기다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고. 

 

오늘은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고 우연히 나의 극장에 당도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다 잠깐 쉬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필름을 걸었다. 누군가의 삶이 조각처럼 퍼져 한 편의 영화가 되듯이 우리가 살아낸 시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어떻게든 무언가가 되어 남는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도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Cinema cahiers : 프로그램 노트

 

 

<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

페드로 알모도바르, 2019 / 스페인, 프랑스 / 113분 /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아시에르 에산디아, 페넬로페 크루즈

볼 수 있는 OTT 플랫폼: 왓챠 / 웨이브

 

영화감독 살바도르는 영화를 찍지 못하는 괴로움, 심해져가는 통증을 겪으며 지난 인생의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결국 그에게 인생이란, 영화란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못 찍는다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어”

영화를 찍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에 괴로워하던 감독 살바도르는 영화 속에서 자주 위의 대사를 말합니다.

'영화'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어떤 일을 넣어도 깊이 공감되시나요? 그 시간을 버티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로 오늘의 영화 레터를 써보았어요. 모든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분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요.

실은, 요즘 저도 알 수 없는 무기력과 의욕 없음에 도저히 글을 쓰지 못하다 어렵게 노트북을 켜 이 영화를 떠올리며 한 문장씩 썼어요. 그래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영화와 그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조금씩 힘을 내서 써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들도 쌓이고 쌓여 언젠가 창작의 고통보다 기쁨이 큰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를 마칩니다. 항상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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