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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영화 노트

영화가 사라진다면

외장하드가 고장난 어느 날.

2025.09.01 | 조회 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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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거의 일년 만에 다운로드한 영화 파일들을 모아둔 외장하드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오랫동안 방치해두기도 했고 필요없는 파일들은 정리해서 그 사이 받아놓은 옛날 일드 영상을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없었던 외장 하드는 폴더 하나를 눌러 파일을 확인하는 데만 해도 바람개비가 돌며 로딩이 오래 걸렸다. 어? 이상하다. 추출을 하고 다시 연결했다. 바람개비 현상은 똑같았다. 임의로 파일 하나를 선택해 데스크톱에 복사를 시도해보았다. 1분이면 완료될 파일이 한참이 지나도 복사되지 않았고 급기야는 노트북 자체가 멈추기 시작했다. 

 

WD (웨스턴 디지털) 사의 2테라 바이트 짜리 외장하드에서 용량 절반은 거의 15년 넘게 차곡차곡 모아둔 영화 파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구해서 보고 싶은 영화들을 각종 p2p 사이트를 뒤지고, 토렌트를 경유해 내 컴퓨터에 저장해가며 영화를 보았다. 그것이 물론 불법적인 경로인 건 알았지만 영화를 '자료'로서 공부하며 보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다.  avi, mkv, mp4 등의 확장자로 본 영화 중에서 실물로 만져보고 싶고 오래 간직하고픈 영화들이 있으면 dvd를 사서 소장하기도 했다. (그런 영화로는 <아멜리에>, <아는 여자>, <중경삼림>, <비포 선라이즈>가 있다)

 

그 후 영화를 공부하면서는 찾아봐야하는 영화가 늘어났다. 영화 책에서 예시로 언급된 영화들, 전설적인 고전 명작들, 현재 어느 플랫폼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언제든 보고 싶어서 다운로드 해두었다. 그런 작품들은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1테라 바이트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왓챠 등이 생기면서 귀찮게 다운로드를 해야하는 수고로움이 덜해서 좋았다. 점점 영화를 보는 경로는 극장과 OTT가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 했지만 왠지 그 영화들이 외장하드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안심이 되었다. 보고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굳건한 믿음과 달리 외장하드는 영원히 지속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명 물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언제든 고장이 날 수 있는, 오히려 작은 실수에도 알 수 없는 오류들이 생겨날 수 있는 취약한 저장매체였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무한 로딩이 걸리고 강제 종료를 해야만하는 상황이 반복되기 전까지는. 문득 이 영화들이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졌다. 고작 외장하드가 '뻑' 난 것 뿐인데 잠깐 영화를 몽땅 볼 수 없고 갑자기 증발해버린 세상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외장하드를 마주하듯 세상에 '영화'라는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면. 그 상실감과 허탈함을 외장하드의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동안 느꼈다.

 

매일 영화를 보지 않고 저장만 해두던 지난 날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동안 열심히 좀 볼걸. 여전히 OTT에는 서비스 되지 않는 보물같은 영화들이 많은데. 오시마 나기사 영화랑 영구 소장하고싶은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존 카펜터의 영화도 봐야하는데. 있는데 잘 보지 않는 것과 보고 싶어도 존재하지 않아 볼 수 조차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를 것이다. 아무리 극장이 예전만큼 잘 되지 않고 영화의 인기와 위상이 예전같지 않고 '위기'에 늘 봉착한다 하더라도 없어져서는 안된다고, 외장하드를 복구하려 애쓰며 확신했다. 아직도 보지 못한 영화가 너무 많고 어떤 영화를 본 후에 내 삶이, 시각이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설렘을 잃고 싶지 않다.

 

극장에도 더 자주 가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더 많이 하고. 단순히 한국 영화 산업이 어렵다고 동정어린 목소리를 내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소중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영화가 없어진 세상은 분명 이전보다 삭막하고 낭만도 없고 가능성도 없고 타인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며 꿈꿀 필요도 없는 세상일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는 시대의 자화상과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잊을 수 없는 배우들의 얼굴을 기록했고 분명 세상을 조금은 더 다양한 색으로 물들이는 데 기여했다고 믿는다. 가 닿을 수 없는 유일한 '꿈'의 통로이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곳, 어느 시간으로 떠나는 타임머신. 내 작은 노란색 외장 하드에 담긴 영화는 단순히 '파일'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영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나만의 작은 영화 아카이브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일부 영화는 백업에 성공했다. 맥 OS에서 인식되지 않아 윈도우에 맥용 하드를 인식하는 프로그램을 깔고, 맥과 윈도우 겸용 1테라 바이트짜리 USB를 급히 구매해서 옮긴 다음 다른 외장하드에 그 파일들을 조금씩 옮기기로 했다. 윈도우에서는 다행히 무한 로딩이 되는 오류가 덜하고 파일을 옮기는 건 가능했다. 앞으론 좀 더 부지런히 영화를 볼 생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영화가 사라지기 전에. 


📚 영화 노트를 쓰며 읽은 책

클릭하면 교보문고 상세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어요 :)
클릭하면 교보문고 상세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어요 :)

영화도둑일기 / 한민수 지음 / 미디어버스 

 

외장하드가 복구되고 백업을 하는 동안, 작년에 사두고 아직 펴보지 않은 이 책을 펼쳐들어 읽었어요. 불법적인 경로로 영화를 구해볼 수 밖에 없는 시네필의 기록이자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숨어있는 영화를 찾아 헤매는 '영화 해적질'이라는 행위에 대한 고찰이 담긴 책입니다. 적극적으로 영화를 소장하려는 욕망을 가진 시네필이라면 공감하며 읽으실 책이에요. 저도 한 편으론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두는 행위에 대해 저도 죄책감 아닌 죄책감을 느꼈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며 그건 내가 영화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야!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까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최대한 영화는 극장이나 OTT, DVD나 블루레이, 영화제 등에서 합법적으로 봐야겠지요. 그 외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영화 해적질'은 그런 영화도 기억하고 사랑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영화를 도둑질해서라도 갖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러운 마음이지 않을까요.

 

- 책 속에서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다운로드하세요. 그건 아마 거기에 영원히 있지 않을 겁니다. [...] 해적질은 보존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걸 불법 복제 하세요. - UbuWeb (미국의 작가 케네스 골드스미스가 운영하는 아카이브 사이트) - p.35

 

가끔 선동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여러 해적들의 지도를 그려 보고 했던 것은, 사실 어딘가에 존재할 미래의 해적 동료를 구인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동료가 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신이 이 책의 어딘가에서 그러한 재미를 찾고, 계속해서 일상적인 즐거움으로 영화를 본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 p.68

 

구독자님에게도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서 간직하고 싶은 영화가 있나요? 가끔은 어딘가에 묻혀있을 영화를 찾는 해적이 되어 인터넷 세계를 탐험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같아요. 우리는 거기서 어떤 영화를 만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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