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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시네마 카이에는 잠시 쉬어갑니다.

기다림의 장면들

기다림의 장면들 #03: 이레이저 헤드

꿈을 꾸고 싶은 이를 기다리며

2025.07.06 | 조회 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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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카이에

메일함 속 영화관 ‘시네마 카이에’입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에세이를 보내드려요. 기다림에 대한 영화, 영화를 향한 기다림을 주로 다룹니다. 협업 및 제안문의 : cahiersbooks@gmail.com

일주일에 단 하루 상영하는 영화를 위해 나머지 6일은 분주하다. 이 곳을 찾을 관객이 그 나머지 날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상상하고 그 감정에 딱 어울릴 영화를 고르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상엔 수많은 영화들이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필름 저장고에는 대략 1800여편이 보관되어 있다. 어떤 것들은 군데 군데 손상되어 상영할 수 없는 지경인 것도 있고, 깨끗히 보존된 것들도 있다. 그 중 단 한편이 관객에게 가닿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잊고 있던 감정을 건드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곳에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다 잠이 오지 않는 일요일 밤, 마치 유령처럼 거리를 헤매다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은 이끌리듯 이곳에 온다. 그것도 혼자. 막막한 내일이 두려워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 영화를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밤을 견딜 수 없는 사람,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로 한 사람 등이 이곳을 찾는다.

 

저장고 속 필름을 훑어보며 그들이 좋아할 영화를 드디어 골랐다.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틀면 극장 안은 이상한 공간이 된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곳. 꿈을 여러 사람과 실시간으로 보는 듯한 체험이 가능한 곳으로.

 

<이레이저 헤드> 속 한 장면
<이레이저 헤드> 속 한 장면

언젠가 <이레이저 헤드>와 비슷한 꿈을 꾼 것만 같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징그러운 생명체에 시달리고, 좁은 방 구석에는 밝은데 어딘가 기괴한 노래를 부르는 소녀가 있고, 짙은 흑백의 세계가 익숙한 일상인 그런 꿈. 터질듯한 불안의 형상으로 가득한 꿈. 깨어나서 설명해보면 앞뒤가 안맞는데 분명 방금 전 꿈 속에선 그 모든게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보다보면 묘한 기시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분명 저 영화도 카메라 뒷편에는 수많은 스탭들이 있었을 것이고 지난한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일텐데도 어느날 툭하고 자연발생된 이미지의 잔상들 같다. 불안, 공포, 두려움, 흥분과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우연의 이미지들.

 

천재적인 감각으로 뚝딱 만들어냈을 것 같지만, <이레이저 헤드>는 놀랍게도 만드는 데 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데뷔작인 <이레이저 헤드>에는 5년의 제작 기간동안 그가 느꼈을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매 프레임마다 새겨져있다. 머릿속 이미지가 필름에 기록되어 한편의 영화가 될 때까지의 기다림. 제대로 완성될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가 꿨던 악몽이 곧 이 영화가 된 것은 아닐까.

 

데이빗 린치의 영화가 끝나고 암전이 되었던 극장에 불이 켜지면 잠시 최면에 걸렸다 풀려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방금 내가 본 것을 무어라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끌린다. 올해 초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새로운 영화를 볼 순 없지만 문득 우리의 꿈 속에 불쑥 등장해서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것을 또 보여줄 것만 같다.

 

똑똑. 매표소 창구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백인 노인은 말없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1장’을 표시한다. 랜덤으로 배치된 좌석에도 그는 군말없이 표를 받아든다. 그러곤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입장권을 바라보며 ‘이레이저 헤드… 오래 기다린 영화죠.’ 라고 말한다. 그는 로비 구석에 마련된 소파로 가 조용히 앉는다. 말끔히 넥타이까지 하고 정장을 빼입은 멋쟁이 할아버지. 그는 데이빗 린치와 매우 닮아 있었다.


Cinema cahiers : 프로그램 노트

 

 

<이레이저 헤드> Eraserhead

데이빗 린치, 1977 / 미국 / 89분 /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잭 낸스, 샬럿 스튜어트

 

인쇄공으로 일하는 헨리와 그의 여자친구 메리. 둘은 결혼을 하기 전, 아이가 생긴다. 메리와 함께 살며 아이를 돌보게 되는 헨리. 그들의 아이는 평범하지 않다. 조산으로 인해 몸이 아픈 아이는 매일 밤 괴롭게 울어댄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환청같다. 결국 지쳐버린 메리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헨리는 아이와 남겨진 채 끝없는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1977년, 뉴욕의 어느 독립 영화관에서 상영된 <이레이저 헤드>는 입소문을 타며 팬이 생겨나고, 데이빗 린치 감독은 이 영화로 주목받는 감독이 됩니다. <이레이저 헤드>는 바로 그의 데뷔작으로 컬트영화의 고전으로 영화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다른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이레이저 헤드>만큼 영화 자체가 ‘꿈’으로 인식되었던 영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를 <이레이저 헤드>로 고른 이유는, ‘시네마 카이에’의 배경과 무척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시네마 카이에’는 누군가의 꿈 속에 존재하는 영화관이라고 상상하며 글을 썼습니다. 영화는 곧 모두와 공유하며 볼 수 있는 ‘꿈’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어요. ‘시네마 카이에’라는 극장은 현실에서 내가 본 영화들이 기억 속 필름 저장고에 쌓이고, 그 영화 중 한 편을 소환해 꿈으로 상영하는 어떤 극장이 있을 거라고 상상한 결과입니다. 만약 정말 그런 극장이 꿈 속 어딘가에 있다면, 데이빗 린치 감독은 자주 그 곳을 찾아올 것 같아요. 이제는 꿈에서만 존재하는 데이빗 린치 감독에게 존경과 애정을 담아 이 레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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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의 영화에 매혹되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해요.

데이빗 린치의 인터뷰집입니다. 영화를 본 후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로 남곤 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수수께끼의 비밀이 조금은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 린치는 이 영화 (이레이저 헤드)를 ‘음울하고 골치 아픈 것들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 p.30
  • “<이레이저 헤드>에는 열려 있는 부분이 많고 관객은 그 영역들로 들어갑니다. (중략) 나한테는 정말로 논리적인 영화입니다. 따르는 규칙이 있고, 영화 내내 따르는 특정한 감정이 있죠.” - 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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