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밀플뢰르’]
어느 낯익고 낯선 이야기
<여행과 나날>(미야케 쇼, 2025)
“일상이란 주변의 사물이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땐 어김없이 낯설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선했던 사물과 감정들도 이제는 말에 쫓기고 있다. 나는 말이란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여행과 나날> 각본가 ‘이’의 독백
‘나는 말이란 틀에 갇혀 있다’
의아했습니다. 적어도 영화 초반부, 각본가 ‘이’(심은경)가 집필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본 분이라면 공감하시겠지요. 그녀는 경건한 자세로 백지를 마주 봅니다.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연필을 들고 첫 단어를 적어요. 연필의 흑연이 새하얀 종이에 감촉되면서 언어가 조형됩니다. “S#1. 여름, 바닷가. 막다른 길에 자동차 1대 세워져 있다.” 부사 없이 단출하게 적힌 단어들로 어떤 상황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포즈(pause). 재미난 생각이 떠오른 듯 헛웃음을 짓던 그녀는 다시 연필을 들고 세계를 창조하는 일을 이어갑니다. “뒷좌석에서 여성이 잠에서 깬다.”라 적으니, 정말 해안가에 세워진 자동차 2열에서 여성이 눈을 뜨네요. 잠시 후 밝혀지겠지만, 이 영화의 전반부는 그녀가 각본을 쓴 영화 <여름의 서경>의 상영에 바쳐집니다.
영화의 중반부인, <여름의 서경> 상영 직후 열린 GV 장면은 <여름과 나날>의 전반과 후반을 가르는 분기점이에요. 전문가와 관객의 반응은 좋았습니다. 의아한 점은, 이 일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던 그녀가 밝힌 뜻밖의 고백인데요. “나는 별로 재능이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떤 생각의 궤적으로 이 결론에 도달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의 독백이 흐릅니다. “일상이란 주변의 사물이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땐 어김없이 낯설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신선했던 사물과 감정들도 이제는 말에 쫓기고 있다. 나는 말이란 틀에 갇혀 있다.” 마치 ‘말’이 감옥이라도 된 듯이, ‘이’는 압박감(‘말에 쫓기고 있다’)과 갑갑함(‘말이란 틀에 갇혀 있다’)을 느낍니다. 이건 어떤 감정일까요?
‘이’의 모국어가 한국어이지만, 일본어도 쓸 수 있다는 설정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가 말에 대해 느끼는 감각은 일본어를 사용할 때 발생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의 고민은 일본어가 아직 생경해서라기보다, 일본어도 지나치게 익숙해진 데서 나옵니다. 그 익숙함이 그녀에게 감옥에 갇힌 듯한 압박감과 갑갑함을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말 자체, 그러니까 ‘언어’로 코드화된 사고 체계가 답답한 것 아닐까요.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사고, 관념, 관습, 문화, 정서의 집합체이기도 하니까요. 3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어를 사용해 온 저로선, 상상해 보지 못한 감각이기도 해요.
![<여행과 나날> [네이버 영화]](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10/1792137163184406.jpeg)
말없이 여행하기
그래서 ‘이’에게 여행이 필요합니다. 말이라는 일상에서 달아나기 위해서요. 생각해 보면 말은 매체(media)여서, 세계와 나를 중개하죠. 우리는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정보와 감각을 언어를 통해 번역합니다. 언어가 길어올리지 못한 잔여물들은 무의식이라는 층위에서 정돈되지 않은 어떤 덩어리로 잠재해 있을 테고요. ‘이’가 권태를 느끼는 지점은 바로 이것 같아요. 그녀의 말 위에는 의식과 관습이라는 먼지가 가라앉아 있어서, 아무리 털어내어도 더 이상 새롭거나 낯선 감각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 그럴 땐 말의 중개를 걷어차고, 전면적인 세계와의 전면적인 부딪힘(대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에서 ‘이’는 쉽게 숙소를 구하지 못합니다. 예약하지 않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 설정은 중요해요. 애초에 계획된 여행이었다면 세계와 나 사이에는 ‘말’이 놓였을 테니까요.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그런 점에서 비교할 만합니다. 각본은 그녀의 직업이자 세계를 인식하는 틀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세계를 감각합니다. 물론 극중 캐릭터는 그녀를 어느 정도 반영하겠으나, 결코 그녀 자신이 될 수는 없겠죠. 이처럼 전반부의 이야기가 <여름의 서경> 캐릭터가 여행하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그녀 자신이 여행하는 이야기로 바뀝니다. 차이점은 또 있습니다. 카메라. 빈손으로 훌쩍 떠난 전반부의 여행자(캐릭터)와 달리, 후반부 ‘이’의 손에는 카메라가 있네요.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사고와 감정의 잔여물과 세계라는 이미지의 첫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여행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을지도 몰라요. 언어라는 안정된 질서와 체계는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안전하게 만드는 테두리이기도 한데요. 말이 더 이상 보호해 주지 못하는 곳에서 나는 어떤 실재와 대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라는 통념으로 가렸던 흉측한 것, 결코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공포(또는 욕망). 안정된 나를 교란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그 모든 요소들의 총합을 만나는 것이 이 여행의 여로입니다. 그래서인지 <여행과 나날>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웁니다. 죽은 물고기의 사체, 곶에서 발견된 젊은 여인과 그 품에 안겨 있던 영아 두 시신 이야기. 동사한 황금 잉어…. 공포스럽지만 동시에 매혹적이기도 한 삶의 어두운 실재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했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172쪽.) 그렇게 내가 ‘(상징적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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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귀환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에는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눈물에 대한 도발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흔히 복음서 저자들은 베드로의 통곡을 예수님을 부인한 죄책감이라고 해석을 유도하지만, 실은 수탉의 울음소리로 인해 ‘베드로’라는 정돈된 자아상이 깨지고 찢겼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새벽을 알리는 그 거친 노래가 베드로를 그 자신의 것과는 다른 층위에 빠뜨린다. 예수의 층위, 베드로의 층위, 베드로 이전의 층위(시몬의 층위), 시몬 이전의 층위 (…)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소리의 내부에는 그가 부인하는 이름(예수)보다도, 그가 저버렸던 옛 이름(시몬)보다도 더 멀리 떨어진 곳에 (…) 별안간 되돌려 보낸다.”(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프란츠, 2017, 86쪽) 수탉의 울음소리가 베드로를,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시몬으로, 혹은 시몬 이전의 한 동물로서의 인간으로, 더 이전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거죠.
이 해석은 실재와의 만남이 소리로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미지만이 아니라요. 수탉의 울음소리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니 여행에 필요한 것은 카메라만이 아닐 겁니다. 청각. 상징적 나를 찢으며 열어젖히는 실재의 음향을 듣는 귀. 그걸 들어야 나는 비로소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것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요? 모든 선원이 밀랍으로 귀를 막았을 때, 기어이 제 몸을 묶어 세이렌의 음악을 들어야 했던 것은, 실재(나의 무의식)와의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여행(귀환)의 본질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모든 여행은 나에게로 귀환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풍경과 상처』, 문학동네, 1994, 4쪽)이라 적은 김훈의 문장도 떠오릅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의 방향은 공간의 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내면의 수직적인 깊이로 내려가는 것이겠고요. 두 번째 여행의 한바탕 소동 끝에, ‘이’는 다시 연필을 듭니다. 언어의 세계로의 귀환. 그녀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적을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막을 내립니다. 분명 그 이야기는, 그녀를 닮았지만, 결코 그녀의 이전 작품에서 본 적 없는 ‘낯익고 낯선’ 이야기일 거예요.
![<여행과 나날> [네이버 영화]](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10/1792137276970782.jpeg)
8회 모기영 개막작 공개

🎬 𝟴𝘁𝗵 𝗢𝗽𝗲𝗻𝗶𝗻𝗴 𝗙𝗶𝗹𝗺
제8회 모기영 개막작을 공개합니다!
스티븐 킹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척의 일생>은 39세 나이에 죽음을 앞둔 평범한 회계사 척의 삶을 3막 구성의 역순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공포 영화 전문 감독 마이클 플래너건이 연출한 판타지 드라마입니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수많은 무리가 있다(I contain multitudes)"라는 월트 휘트먼의 시구를 빌려, 한 인간의 생애가 곧 하나의 거대한 우주임을 담담히 펼쳐내는 작품입니다.
💬 시놉시스
인터넷은 끊기고, 도로 곳곳은 구멍이 뚫려 마비된 세상. 마치 지구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는 것만 같은 나날들의 연속이다. 교사 '마티'는 온 세상이 언제 어둠에 갇혀도 이상할리 없는 지금, 이혼했지만 사랑이 남은 ‘펠리샤’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데 이 절박한 시간에도 거리에서, TV에서,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누군가를 위한 광고.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알거나 본 적이 없다는 이 '척'이라는 남자는 마티에게 커다란 궁금증을 남긴다. 그는 누구일까? 세상은 정말 사라져만 가는 것일까?
✔️ <척의 일생>은 11월 19일(목)에 진행되는
제8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개막식에서 상영됩니다.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𝟴𝘁𝗵 𝗖𝗵𝗿𝗶𝘀𝘁𝗶𝗮𝗻 𝗙𝗶𝗹𝗺 𝗙𝗲𝘀𝘁𝗶𝘃𝗮𝗹 𝗙𝗼𝗿 𝗘𝘃𝗲𝗿𝘆𝗼𝗻𝗲
홍대 KT&G 상상마당 시네마
𝟭𝟭.𝟭𝟵 - 𝟭𝟭.𝟮𝟮
글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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