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그런 영화가 있어요. 영화를 감싸는 표층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 같은데 표층 너머를 들여다보면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고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는. 제게 그 영화는 <최악의 하루>입니다. 이 영화의 표층은 은희(한예리)가 겪은 단 하루치의 곤경을 보여주지만, 그 곤경 너머에는 꽤 오랜시간 우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내용이 담겨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하지만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을 거예요.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테니까요.
영화에서 은희는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만나죠. 그중 은희가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두 남자를 제외하고 만난 사람은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입니다. 은희는 소설가 앞에서만큼은 어떤 ‘연극’도 하지 않고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죠. 저는 은희가 두 명의 남자와 맺는 관계보다 소설가 료헤이와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의미심장한 것은 은희는 료헤이에게 마치 조물주에게 그렇게 하듯 자신의 한계와 난처함을 무람없이 말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쪽입니다. 은희는 실은 료헤이가 창작한 소설 속 인물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영화는 료헤이의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기도 하죠. “여행지에서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꿈 덕분에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곤경에 처한 은희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은희를 만들어낸 료헤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일 거예요.
한국에서 열린 출간기념회에서 료헤이는 조금은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출간기념회라고 하긴 했지만, 참석한 사람은 고작 단 두 명밖에 없던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로 번역된 료헤이의 책은 출간 후 6개월 동안 팔린 건 고작 100권이 조금 넘는 숫자였죠. 그마저도 참석한 두 명은 료헤이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그저 산책하다가 우연히 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조금은 황당한 출간기념회 이후에, 료헤이는 어느 잡지 기자와 만납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정한 출간기념회일지도 모릅니다. 료헤이의 책을 깊이 읽어온 독자이기도 한 그녀는 물어요.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나요?” 료헤이는 대답합니다. “글은 글일 뿐이니까요. 저는 읽는 사람의 반응만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물어요. “그럼 그렇게 욕망이 많은 사람입니까?” 료헤이는 소설과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그녀의 독법을 거부한다는 듯이 부인합니다. “제 소설 속 인물에게 많은 욕망이 있지만 그게 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의 것이에요.” 인터뷰는 기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저는 부끄러웠어요. 제 자신과 그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기자와 료헤이의 대화 장면은 여러 생각을 남깁니다. 어쩌면 료헤이가 자기 소설 속 인물에게 가혹할 수 있던 건, 소설과 자기 삶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인물의 고통을 제 것처럼 끌어안고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을 마주하고서 료헤이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인식을 조금 달리 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내 삶을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클 거예요. 자기 삶을 서사화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를 창조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내 삶을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가보다 비평가에 가깝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누구도 나라는 서사에서 단독저자가 될 수는 없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의 서사는 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신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한번 씌어진 내 삶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일 말이에요. 내가 겪은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길지 고요히 생각하는 마음. 비평가가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처럼요.
그런 점에서 <최악의 하루>의 엔딩은 인상적이에요. 료헤이는 새로운 소설을 씁니다. 지금과는 다른 어느 추운 겨울, 무표정하게 내리는 눈 사이로 주인공은 걸어오다가 순간 뒤를 돌아봐요. 무언가 놓친 것이 있거나, 영원히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이 떠올랐거나.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가 자신을 해하려 오는 것을 발견했거나. 주인공의 뒤돌아보는 행동은 좋지 않은 예감을 안깁니다. 지금까지의 료헤이의 소설이었다면 독자는 그 부분에서 마음을 가다듬었을 거예요. 무슨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료헤이는 전혀 다른 문장을 이어 적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니까요.” 그렇게 은희의 하루는 다르게 씌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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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모기영! - 성서한국 전국대회
7월 27일부터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열리는 성서한국 전국대회에서 모기영을 만날 수 있어요! 7/28~29(금~토) 이틀간 '사회선교 박람회' 부스에서 모기영 부스를 찾아주세요~ 28일 금요일 오후에는 박일아 프로그래머의 <내일을 위한 시간> 씨네토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2023년의 반환점을 지나, 지금은 남은 절반을 향해 시작하는 7월이네요.
우리가 지나온/이미 씌어진 시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를,
이제 씌어질 삶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모기영은 바라고 있어요.
글 : 이정식, 강원중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3년 7월 22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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