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210호

[최은의 ‘그 영화 봤어요?’] <철들 무렵>(2026)

2026.09.05 | 조회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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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의 ‘그 영화 봤어요?’]

<철들 무렵>(2026): 돌봄과 독립, 그 (불)가능한 공존에 관하여

 

콩가루 가족이 아닙니다, 철가루 가족이라네요. 올 추석 즈음 개봉할 영화 <철들 무렵> 이야기입니다. 콩가루는 바람에 형체도 없이 날아가기 쉽고 여차하면 물에 녹여 국수라도 후루룩 말아먹으면 그만이지만 철가루는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도 막대자석이라도 하나 만나면 어디선가 번개같이 나타나 시커멓게 들러붙곤 하겠죠. 철택씨(기주봉)네 가족에게는 그의 심장 근처에 생긴 암이 그런 자석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철택의 직업이 용접공이군요.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딸 정미(하윤경)는 단역배우입니다. 얼굴과 온몸에 피칠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으로 등장하는데요, 무심히 아빠를 따라 병원에 갔다가 철택이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안고 몹시 당황하지요. 연세대학교를 나왔지만 현재는 일용직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는 철택은 교장으로 은퇴한 아내 현숙(양말복)과 20년째 별거중이어서 사실상 이혼상태입니다. 현숙은 최근 교외에 널찍한 집을 장만해서 평화로운 노년을 꿈꾸는 공무원연금생활자이고요, 90대 노모의 돌봄과 부양문제를 두고 위아래로 둘씩, 네 명의 형제자매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큰 집에서 적적하기도 할 테니 혼자 사는 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오순도순(!) 살든지, 아니면 네 집 마당에서 구순잔치라도 준비해 다오,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형제들은 현숙을 다정하게 몰아세우고 있었죠.

오랜 갈등과 상처로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누군가의 질병이나 사고를 계기로 똘똘 뭉치는 가족들의 이야기야 더 이상 어떤 가공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만큼 흔한 가족서사일 수 있겠으나, <철들 무렵>은 단연 특별합니다. 정미와 철택과 현숙 가족이 중심이지만, 정미의 부계로는 철택의 형님 관택(김종구)과 그의 아들 부부와 손자 동민의 사연이 있고요, 모계로는 할머니 옥남(원미원)과 현숙을 포함한 그의 다섯 자녀가 있습니다. 게다가 철택은 모친의 위패와 사진을 집에 모셔두고 그 앞에서 매일 기도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존재를 계속해서 소환하고 있지요.

영화는 이처럼 독립했지만 결코 독립적으로 살 수 없는 사연을 모든 가족에게 골고루 나누어 두었습니다. 예컨대 관택은 손자의 돌봄을 맡고 있고, 관택의 아들 며느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셈이고, 철택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고, 현숙의 노모는 당번을 정해 방문하는 자녀들의 돌봄을 받고 있어요.

이들을 느슨하게 엮어주는 역할이 현숙의 90세 노모 옥남에게 부여되어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옥남의 목소리는 틈틈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격렬한 민주화 운동의 시기를 거친 인물의 회고록에 가까운 문장들을 낭독하고 그 사이 여러 자료화면들이 삽입되어 이 가족의 서사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연결합니다. 박완서 선생의 글들에서 인용된 문장들이었어요. 박완서 선생을 존경하고 그의 작품에 가 닿고 싶었다는 정승오 감독은 <철들 무렵>을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누고 각각의 장에 인터뷰집 『박완서의 말』(마음산책, 2018)에서 추출한 구절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하여’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상처 속에 박혀 있는 말뚝’ 같은 제목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는 얼핏 어처구니없고 유난한 이 가족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해하게 합니다. 식민지배와 전쟁과 분단과 국가폭력으로 혈육 보존과 생존이 위태롭고 불안한 와중에 우리에게 가족이 어떻게 해서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서라도 지켜야할 절박하고 지순한 가치가 되었는지, 이처럼 지긋지긋하고 끈적한데 또 그런 대로 견딜 만 한 동거가 어떻게 가능한지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지요.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철들 무렵>은 첫 장편 <이장>(2020)으로 한국형 가족영화 장르에 신선한 바람으로 등장한 정승오 감독 작품입니다. <이장>에서 누구 하나 평탄해 보이지 않았던 4녀 1남, 5남매가 서로를 물고 뜯는 다툼으로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웃프게 지켜봐야 했다면, <철들 무렵>에서 정미는 그렇게 아웅다웅할 형제자매마저 없다는 것이 가장 서럽고 짠해 보입니다. 외동이라서 ‘독박 돌봄’의 짐을 피하기 어려운 운명이라서요.

정승오 감독은 이 영화가 외아들로서 홀로 된 아버지를 간병한 본인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어요. 20여 년 데면데면하던 부자가 아버지의 말기암 치료를 위해 한달간 병원생활을 하면서 절대의존과 보호 시스템으로 묶여 꼭 붙어있어야 했던 거지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정미가 보호자 침상에서 짜증스럽게 잠을 설치는 몽타주 장면은 리얼하고도 리얼합니다. ”혈압, 재실게요!” 체온, 재실게요!“ ”채혈, 하실게요!“ 라는 간호병동 사투리를 외치며 커튼을 젖히는 그분들의 명랑한 방문을 매일 한밤중에 수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장면이 그렇게 고맙게 웃기지는 않겠지만요.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두 계절쯤 ’보호자생활‘을 하는 거 아니었던가요??! ^^;;)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어떤 영화들은 이렇게 사소하고 심드렁한 한두 장면으로 그 영화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포인트를 얻어내기도 하는데요, 정승오 감독의 작품에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꽤 여럿 등장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작 <이장>애서도 그런 장면이 몇 있었어요. 큰언니가 ADHD인 듯한 아들 동민(<철들 무렵>에 나오는 정미 조카의 이름과 같네요)에게 먹일 안정제를 손가방에서 꺼내려다가 멈칫하고 그만 두는 찰나를 포착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삼촌의 여친에게 폭 빠져 ‘누나’의 손을 놓지 않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가 위험해보이지도 불안하거나 아파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철들 무렵>에서 만난 또 다른 장면들은 인생의 아이러니와 비애를 담고 있어 더 기발합니다. 정미는 얼굴 식별조차 불가한 ‘귀신 7’쯤의 역할을 할 때조차도 캐릭터 연구와 몰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단역배우였는데요(본디 중전마마의 무당이었으나 바른말을 해서 처형당해 귀신이 되었다는군요), 어느 날 정미는 집안 문제와 거듭되는 오디션 실패로 상심해서 모든 의욕을 상실한 나머지, 우루루 몰려가는 귀신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멀뚱히 서 있고 맙니다. 엑스트라 연기자의 비애는 이 경우 보통 감독에게 호되게 당하고 눈물을 쏙 빼는 것으로 재현되곤 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극중 감독에게 “OK, 컷!”을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단역 귀신 정미의 무가치함 또는 무의미가 무참하게 증명되고 맙니다.

이 장면이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것은 정미의 사회적 역할과 가족 내에서의 막중한 역할, 특히 모아놓은 돈도 없는 아빠의 간병과 치료비까지 해결해야 하는 책임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엄마 현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황혼 이혼으로 우아하게 독립을 완성하려던 현숙의 계획은 바로 그, 독립적인 싱글이라는 점 때문에 친정 형제들로부터 어머니 부양에 적임자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철택의 경우는 서류상으로 이혼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법적인 아내가 공무원 연금 수령자여서 기초수급 혜택을 받을 수 없죠.

연세대를 나왔지만 짐작컨대 한때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것 같고, 그러면서도 운동권 주류에 몸을 끼워넣을 주변머리는 또 안 되었던 것 같은 철택의 과거사도 여러 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아마도 화염병을 들고 최루가스에 몸을 던지며 열정을 불태웠거나 최소한 흉내라도 내었던 ’대학생들‘ 중 하나일겁니다. 박완서 선생이라면 혹시 이렇게 물었을까요. “그 많던 학생은(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철들 무렵>(정승오, 2026) [이미지제공: 인디스토리]

인간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스물스물 찾아온 불청객, 돌봄이라는 변수를 놓고 주저하고 좌절해야만 하는 삶의 복잡성과 그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시점이 다름 아닌 ‘철들 무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때에야 비로소 철이 들게 된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요. 서로 상처를 헤집으며 엄청난 독설을 퍼붓고 나서도 등 돌리고서라도 나란히 눕고, 또 슬그머니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앙칼지게 쏘아대고 나서도 생일잔치는 또 그럭저럭 잘 해내고야 마는 것,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고 그것도 진심이고 이것도 진심이라는 점을 애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을 못내 수긍하고 심지어 고마워하게 되면서, 우리는 철이 들어가겠지요.

꽤 웃기고 적당히 신산한 영화 <철들 무렵>은 9월 16일 극장 개봉합니다. 추석엔 역시 가족 영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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