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의 ‘ 그 영화 봤어요?’]
<파리의 사생활>(2026):
최면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녀가 울었다
이유도 모르는데 눈물이 줄줄 흐른 경험이 혹시 있으신가요? 정신과 의사인 릴리안(조디 포스터)은 이건 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과의사인 전남편 가브리엘(다니엘 오테유)을 찾아갔죠. 가브리엘조차도 릴리안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건 처음 본다고 했어요. 뾰족한 진단이 안 나오자 릴리안은 최면술사를 찾아갑니다. 최면술사는 “아직은 울어야 해요. 당신은 애도중이예요.”라고 말해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릴리안은 9년 동안 담당했던 환자의 부고를 듣고 추도식에 갔다가 환자의 가족으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나오는 길이었거든요.
독일어 교사였던 폴라(비르지니 에피라)의 남편 시몽(마티유 아말릭)은 지난주까지도 멀쩡히 릴리안에게 상담을 받았던 아내의 죽음이 릴리안 때문이라고 분노했어요. 폴라의 사인은 진정제 과다복용이었지요. 폴라의 딸은 릴리안의 처방전 뒤에 쓰인 독일어 “킨더 토트 Kinder tod”가 릴리안에게 남긴 폴라의 단서일 거라며 릴리안에게 처방전을 건네줍니다. 오랜 상담으로 폴라 가족의 비밀까지도 알고 있는 릴리안은 폴라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믿고 사건을 파헤치기로 합니다. 최면으로 알게 된 자신과 폴라의 전생을 포함해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날수록 릴리안은 시몽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며 의심의 불씨를 키워갑니다.

범인을 찾으려다 나를 찾는 이야기
<파리의 사생활>은 이처럼 환자의 죽음을 둘러싼 릴리안의 죄책감과 의심이 만들어낸 미스터리 추적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릴리안이 진료실 바깥 폴라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영화는 점차 릴리안의 내면을 탐험하는 심리극이 되었다가, 견고해보였던 릴리안의 방어막들이 차례로 허물어지면서 발생하는 한바탕 소동극이기도 하고, 어느 시점엔가는 블랙코미디가 되어 실소를 유발하죠. 이 모든 것이 한 영화에 담길 수 있었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조디 포스터와 다니엘 오테유, 마티유 아말릭 같은 대스타 배우들의 열연과 그들의 의외성으로부터 조화를 이끌어낸 감독 레베카 즐로토프스키의 능력 덕분입니다.
얄궂게도 영화에서 가장 큰 웃음과 감동은 엄격하고 깐깐해 보이는 릴리안이 엉뚱하고 비이성적인 주장으로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면에 있었어요. <택시 드라이버>(1976)와 <양들의 침묵>(1991)과 <콘택트>(1997)의 신비롭고 냉철하고 지적인 조디 포스터 이미지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죠. 가족들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해볼게요. 베테랑 정신분석의가 최면술사를 만나고 오더니 하나뿐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전생에 너는 친독 민병대였어. 나는 유대인 음악가였고. 너는 나를 잡으러왔어. 그래서 내가 너랑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데 릴리안의 이런 모습이 저는 왜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였을까요?

“나 이제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이 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녀가 전생을 전적으로 믿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에게는 단지 ‘이유’가 필요했을 거예요. 평생 자기 아들을 충분히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또는 핑계.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알았으니 됐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전쟁 같은 긴장과 오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릴리안에게 가장 절박했던 일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어느 겨울과 관계가 있으며 생각보다 뿌리 깊은 근원적 체험을 경유한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영화 말미에 가서야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즐로토프스키는 이 영화의 첫 이미지로 눈밭의 손을 선택했어요. 눈 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이 돌연 움찔하는데요, 발갛게 얼어붙은 손에 온기가 돌면서 무언가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죠. 차가움, 얼어붙음, 겨울, 냉정함, 흔들림 없음.... 등이 정신과의사 릴리안에게 어울리는 말들이었다면, 이제 그녀의 삶을 움직일 다른 단어들이 도달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작입니다.
인류의 뛰어난 서사들에서 그랬듯이 회생을 약속하는 단어가 부정의 의미를 담고 먼저 찾아온 것도 돌이켜 생각해보게 됩니다. ‘죽음’과 같은 고전적이고 비장한 어휘와 함께 이웃 젊은이들로부터 날아온 ‘갑분싸’같은 현대어가 섞여 있었어요. 영화에서 릴리안의 무너짐은 이미 그 시점에 시작된 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말조차도 검색해본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화를 내야 할 타이밍조차 놓쳐 버린 무력감을 경험한 그 때 말입니다. 갑자기 중세인이 된 듯한 짜증이었을 수도 있겠고요. 여하튼 온 세계가 나서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았던 그날 이후, 얼어붙어 있었던 릴리안의 손은 한때 영영 놓아버렸던 손을 다시 붙드는 따뜻한 손으로 바뀌어갈 작은 움직임을 만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건의 발단이 된 릴리안의 눈물은 내면의 눈이 녹은 물이기도 하겠네요, 눈을 녹이는 물이거나.

당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뒤늦은 질문
릴리안이 시몽을 뒤쫓고 폴라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녀가 폴라의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고요, 다른 하나는 자신이 폴라의 말, 그러니까 환자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미니디스크에 모든 상담내용을 녹음하고 있었으므로, 환자들과의 상담시간은 그녀에게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의 시간이 아니었어요. 녹음된 기록들이 늘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릴리안은 자기 환자들에 대한 호기심을 빠르게 잃어갔던 건 아닐까요.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폴라의 죽음을 계기로 ‘깨어난’ 릴리안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가브리엘에게 묻습니다, 당신 그때 왜 나를 떠난 거냐고. 폴라는 남편이었던 가브리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아 보이지요. 릴리안이 고집하는 한밤의 탐정극에 마지못해 동참하면서도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그녀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는 가브리엘은 영화에 청량감을 더하는 인물입니다. 안구건조증(눈물없음)이 문제지 눈물이 흐르는 건 고쳐야 할 병이 아니라고, 안과의사 가브리엘은 말했죠.
문득 지난날 경험했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시절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러니까 그들에 대해 무얼 얼마나 알고 있어서 혼자서 덥석 믿고 혼자서 털썩 실망하고 훌쩍(쿨하게?) 돌아서는 일을 반복했을까요. 어쩌면 경청의 알리바이가 되어줄 나만의 ‘미니디스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가 의심 없이 믿었던 것은 한낱 이미지이거나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 자체였는지 모르겠어요. “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는 테스형의 명령은 과연 반박 불가한 명언입니다. 좀, 울어야 할까요?
지난 해 칸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해외영화제들에 초청된 <파리의 사생활>은 오는 7월 15일 개봉합니다. 제5회 모기영 상영작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의 박지민 배우가 단역으로 깜짝 출연해서 반갑더라는 소식 덤으로 전합니다.
소중한 후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후원자분들이 보내주신 응원과 격려는 8회 모기영에 힘을 쏟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보내주신 마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2026년 6월
강도영, 권호경, 김철회, 김현주, 김현진, 문아영, 박성민, 박소원, 박준형, 박진숙, 박현홍, 심에스더, 서완실, 엄태미, 윤영석, 이강희, 이동은, 이범진, 이신석, 이유리, 이정식, 이청자, 이태훈, 장준호, 조하영, 지은실, 채두리, 최영익, 최재용, 최현, 한송희, 한유정, 김대현, 김영준, 김희라, 양동복, 이호정, 강나루, 강원중, 권명희, 김명관, 김지향, 남소영, 노석지, 박현선, 배재우, 송정훈, 유현, 윤나리, 장다나, 정민호, 최규창, 김동석, 김소혜, 김혜영, 최은, 이경은(오늘교회), 김솔지, 신원균, 채송희, 대지교회, 김진선
* 2026 주간모기영은 매주 토요일 오전 11:00시에 발송됩니다.
글 최은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7월 4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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