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의 취미와 취향 : 개봉영화 권해드림]
<미키17>(봉준호, 2025):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이름’
봉준호 감독의 8번째 장편이자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세 번째 작품인 <미키17>은 <설국열차>보다 순하고 <옥자>만큼 무해한 SF/블랙코미디입니다. 2054년 얼음행성 니플하임이 무대인 이 영화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2022년 소설 『미키7』이 원작이에요.
우주선의 ‘익스펜더블(소모품, 소모병력)’인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위험한 일이나 궂은일에 투입됩니다. 그러다 죽으면 육체는 폐기처분되고 따로 저장해놓은 기억을 이식받은 몸으로 다시 프린트되어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를 반복하는 거죠. 미키17은 열일곱 번째로 다시 찍혀 나온 미키의 호칭입니다. 우연찮게 목숨을 부지한 미키17은 기지로 돌아가는데, 미키17이 죽은 줄 알고 만들어낸 미키18이 이미 미키17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규정상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둘 다 폐기되어야 했어요. 큰 일 났습니다.
지구에서 사채업자에 시달리던 미키는 4년쯤 전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과 그의 부인 일파(토니 콜렛)가 이끄는 식민행성 원정에 익스펜더블로 자원했습니다. 니플하임에서 미키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자꾸 죽고 여러 번 폐기되어준 덕에 백신이 개발되었고, 새로 개발한 배양육을 시식해준 덕에 치명적인 부작용도 알게 됐어요.
이쯤 되면 미키가 실험실의 흰쥐나 비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요. 그뿐 아니라 사령관 마샬 부부에게는 여러 나라 여러 시대로부터 추출된 독재자 이미지와 어린아이 같은 그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배우자(!)의 모습이 담겨 있고, 동물 실험이나 생태계 파괴와 절멸과 환경문제, 사익화한 종교와 자본주의의 착취 시스템, 약자에 대한 폭력과 불편부당한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영화에 꼼꼼히 새겨져 있습니다. 참으로 봉준호스럽게 말이지요.
공존의 비밀 : 이름을 아는 것
<옥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키17>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공존과 상생의 테마입니다. 니플하임에는 사람들이 ‘크리퍼’라 부르는 괴생물체가 살고 있었는데요, 그들을 절멸하고 행성을 지배하려는 마샬에게 미키의 연인 나샤(나오미 애키)는 목숨 걸고 소리칩니다. “우리가 외계인인데 왜 저들보고 외계인이라고 해?! 저들은 원래 여기 살고 있었잖아!” 나샤가 흑인이고 여성이어서 더욱 수많은 침략과 폭력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절규였어요.
파국을 막아보려고 미키17이 나섰는데요, 놀랍게도 그들의 리더인 ‘마마 크리퍼’는 미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묻습니다. “루코는 왜 죽였나?” 이에 호응하듯 미키17이 묻습니다. “잡혀 있는 아기이름은 뭔가?” “조코.”
벌레 같고 괴물 같던 원주민 괴생물체 집단이 개별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어요. 마샬이 붙잡은 크리퍼가 수백만 개체 중 하나가 아니라 크리퍼 가족의 소중한 자녀이고 고유한 이름을 지닌 ‘아기 루코’이고 ‘아기 조코’였다는 거죠. 신체에 붉은 글씨 숫자를 기입하거나 볼에 화상을 입혀 식별하는 미키17과 미키18이 다름 아닌 ‘미키 반스’인 것처럼요. 낯설고 혐오스럽거나 심지어 두려운 존재에게 이름을 물을 수 있다면, 최소한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라도 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받는다는 믿음
다만 축적된 기억을 이식하고 외모를 복제한다고 해서 인격까지 복제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미키17과 미키18의 성격은 정 반대였어요. 나샤는 ‘순한 맛 미키’ ‘매운 맛 미키’가 다 있다며 좋아했는데요, 나샤가 미키를 살리려고 흥분하는 걸 보며 미키17은 생각합니다. “맞아, 나샤는 그랬지. 나를 위해 이성을 잃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 나샤는 위험을 무릅쓰고 미키가 죽을 때마다 곁을 지켜주었고 함께 울어주었을 뿐 아니라 미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미키18까지도 사랑해준 사람이었어요.
조건 없는 나샤의 사랑은 미키18과 미키17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제목이 지지하는 우리의 주인공 ‘미키17’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평생을 지배하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힘을 거기서 얻었어요. 마샬 부부가 보이는 종교적 광기와 탐욕이 종교화한 자본주의 또는 기독교의 희화한 모습일 뿐이라고 웃으며 선을 그을 수 있으려면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증명해야 할 일이 있겠구나 싶습니다.
페미, 동성애자, 무슬림, 다문화, 외국인(요즘은 중국인...ㅠ), 야생동물...처럼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자주 비존재로 치부되는 이들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집단으로 파묻혀 있거나 덩어리나 숫자로만 소비되는 타자의 이름을 묻는 일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까요? 인격과 고유한 역사와 기억을 지닌 누군가의 아들딸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샤처럼, 평화를 해치는 폭력 앞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거지요.
내가 선의를 베풀려고 했던 대상으로부터 뜻밖에 많은 것을 이미 받았다는 것, 먼저 싸워준 이들 덕분에 내가 이유 없이 누린 애정과 혜택들이 많다는 것이 깨달아질 때 비로소 눈에 보이고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이 있습니다. 미키 반스가 된 미키가 “나도 행복해도 괜찮아, 죄책감은 이제 그만.”이라고 읊조리는 것처럼,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하는 용기야말로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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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2월 1-28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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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 날, 새봄을 맞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한동안 소식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가득 안고 2025년 첫 주간모기영으로 돌아왔어요.
구독 취소하지 않으시고 (후원 철회하지 않으시고.^^;) 모기영 소식을 기다려주셔서 감사하고 저희의 부족함을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한 해 성실히 달려가기 위해 모기영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참으로 긴 겨울을 지나왔다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은데요,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저를 생각하는 건 저의 소관이 아닙니다. 저의 일은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에요. 저를 생각하는 건 신의 소관이고요.”
-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복있는사람, 2025)에서
모기영을 생각하면 올해도 여러 걱정들이 있지만, 저희도 모기영을 생각하는 것이 신의 소관이라고 생각하며 또 한 번 움직여보려고 합니다.
더디게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는 것이 맞겠지요. 그 일에 한 줌 바람을 얹어봅니다.
고맙습니다.
글 최은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5년 3월 1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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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대신 도모, 배제 대신 축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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