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프로의 영화리뷰]
<사울의 아들>(2015)리뷰
비극의 최전선에 피어난 선함과 인간다움
사울(게자 뢰리히)은 아우슈비츠의 시체 처리 담당 ‘존더코만도’이다. 커다랗게 엑스가 그려진 옷을 입은 그는 가스실로 포로들을 데려가거나 시체를 처리하며 독일군의 학살 현장에 함께 있다. 하지만 그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있는 유대인이다. 어느 날 가스실 시체를 처리하던 중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 있던 남자아이를 목도하게 되고, 마지막 숨이 독일군에 의해 거둬지자 사울은 아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밝힌다. 아들만은 유대법의 장례 절차대로 보내 주고 싶었던 그는 무자비한 폭력과 죽음이 가득한 수용소 안에서 아들의 장례를 치러 줄 랍비를 찾아 나선다.
최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크게 주목받은 영화가 하나 있다. 아우슈비츠 인근에 행복한 터전을 마련한 독일 장교 가족 이야기를 다룬 〈존 오브 인터레스트〉이다. 2014년 〈언더 더 스킨〉으로 영화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조나단 글래이저는 그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주목했고, 이는 일상에 머문 악의 평범성을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재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흥행 열기 속에 덩달아 과거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담았던 영화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중 헝가리 출신 라즐로 네메즈의 데뷔작 〈사울의 아들〉은 신인 감독 연출로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과감한 표현 방식과 깊은 사유의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울의 아들〉은 감독이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에서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증언자들의 기록을 모아 놓은 「잿더미로부터의 음성」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존더코만도들이 1944년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수용소 운영 방식과 유대인 학살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영화의 서두에 등장하듯 존더코만도는 시체를 태우고 치우는 일을 주로 하는 나치의 학살을 돕는 유대인 포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실제 나치가 존더코만도의 역할을 만들게 된 계기는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이 불안과 공포로 통제되지 않자 같은 유대인을 투입시켜 포로들을 가스실로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존더코만도는 일반 포로에 비해 비교적 처우가 좋았고 이동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도 등장하듯 그들 중에는 평소 나치의 악행을 기록한 문서를 몰래 땅에 묻거나, 폴란드 저항군의 카메라로 아우슈비츠 모습을 촬영하며 이 비극을 역사에 알리려고 노력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존더코만도가 대학살의 증인이 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3, 4개월마다 처형했다. 영화 속 여성들이 작업장에서 화약을 빼돌리는 장면이나 외부에 있는 폴란드 저항군을 언급하는 장면 역시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된 부분이다. 그만큼 감독은 「잿더미로부터의 음성」을 읽는 내내 존더코만도들의 힘겨운 폭로를 마주하는 느낌이었고, 마치 아우슈비츠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인지 〈사울의 아들〉은 영웅의 등장이나 대학살의 처참함만을 재현하고자 했던 기존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들과는 달리,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이 비극의 최전선에 있는 사울의 시점을 전례 없는 독자적인 영화언어를 통해 접근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이 흐릿하다. 포커스가 조절이 안 된 수동카메라의 렌즈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스크린 안에서 무언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고 많은 것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도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이곳은 어디인지 어떤 이들이 있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은 채 영화가 시작되지만, 유일하게 관객이 또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시종일관 분주하게 걸어 다니는 사울의 뒷모습, 그리고 생각을 알 수 없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감독은 그런 사울의 모습조차 4:3 화면 비율 안에 가두어서 보는 내내 원인 모를 답답함을 건넨다. 1980년대 깍두기 모양 텔레비전 화면 비율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울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의 눈은 때때로 사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비춘다. 그러나 얄궂게도 포커스는 어느새 흐릿해져 있다. 그러기에 관객은 사울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사실 이 촬영 기법은 이 영화 통틀어 가장 공포스러운 지점이다. 왜냐하면 흐릿해진 이미지들 너머로 관객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오롯이 상상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인간의 상상력은 실제보다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의 형상을 만든다. 뿌옇게 보이는 살색 덩어리들이 산처럼 쌓여 있고, 어느 틈에 무리 지어 등장한 유대인들은 공포에 질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으며, 이따금 들리는 우레와 같은 비명들을 뒤로한 채 묵묵히 일만 하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사울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비로소 이곳이 어딘지 깨닫게 될 때 관객들은 흐릿한 화면 속 가장 큰 비극을 목도한다.
사실 이는 앞서 언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도 비슷한 부분이다. 독일 장교의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죽음의 소리가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오거나, 평화롭게 뱃놀이를 할 때 물에 떠내려오는 죽음의 증거들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더 극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밝은 낮에 벌어지는 살인이 가장 생경한 두려움인 것처럼 그렇게 비극은 끔찍한 눈앞의 도살이 아닌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도중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그곳에 함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지 않는 척, 묵인하는 순간 어느덧 악의 공모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울이 바라보는, 포커스가 나간 뿌연 세상은 사실 그의 마음과 양심의 상태일 것이다. 눈앞의 만행을 애써 무시하는,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바라보는 순간 죄의식에 사로잡힐 두려움에 눈 가리고 귀를 틀어막은 채 독일군이 시키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의 두려운 마음 그 자체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은 뿌옇기만 하던 사울의 세상이 또렷해지는 첫 순간의 이미지이다. 유령처럼 혹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던 그의 초점 없는 뿌연 세계는 가스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아이가 독일군에 의해 질식사하게 되는 장면에서 조금씩 명확해진다. 그리고는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아이의 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또렷이 그 대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울의 눈에도 관객들의 눈에도. 과연 사울은 아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 아이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죽지 않고 숨을 이어간 아들이다. 사울은 의사와 다른 존더코만도에게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진짜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를 아는 이들은 사울에게 너는 아들이 없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사울에게 그 마지막 숨을 보여 줬던 어린아이는 존엄한 한 인간이자, 그들의 다음세대이며, 희망이란 이름을 지닌 그들 모두의 아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아이를 다른 시체와 함께 태우지 않고 장례를 치러 주기로 결심한 사울은 이제 모든 것을 명확히 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벌거벗은 시체, 줄 지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눈빛, 비아냥거리는 독일군의 웃음과 피로 물든 가스실 바닥. 이 비극의 한가운데서 작은 죽음 하나 올바르게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사울이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 유대법의 장례 절차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직계가족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사람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러야 하며, 화장을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랍비가 기도문 카디쉬를 암송해야 전통 장례로 인정된다. 사울이 그 위험 속에서도 아이를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시신을 당일에 묻어 주기 위해 그렇게나 랍비 찾는 일에 집착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장례라는 것, 즉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기리는 행위는 인류와 종교의 근원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의미 있는 행위이다. 감독은 사울의 선택을 통해 이 무의미하고 비참한 죽음이 넘치는 곳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고,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처참한 공간에 그들의 장례문화라는 민족의 정체성을 끌어들여 당시 죽은 자들을 위로한다. 결국 보지 않으려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 사울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피어나는 고귀한 인간다움을 발견한다. 이 지점에서 변화된 바울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건 나뿐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울은 간신히 장례를 치를 랍비를 찾지만 그는 살기 위해 랍비인 척 거짓말한 포로였고, 이를 계기로 존더코만도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곳을 도망쳐 나온다. 아이의 시신을 들고 끝까지 도망치던 사울은 결국 원하는 방식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동료들과 외딴 산장에 몸을 숨긴다. 모두가 쉬는 동안 열린 문 사이로 사울의 눈에 한 남자아이가 보인다. 아마 이 산골 마을에 사는 아이일 것이다.
이 아이를 바라보는 사울의 얼굴은 처음으로 밝게 빛난다.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인간다움의 행위를 선택한 한 남자가 보여 준 고결한 웃음. 비록 영화는 비극으로 엔딩을 맞이하지만 어쩌면 잿더미 속에서도 빛나는 선함의 가치를 실천한 사울에게는 구원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빛과 소금' 2024년 9월호에 실린 장다나 프로그래머의 원고를 편집한 글입니다.
6월부터 진행한 "다문화 영화 상영회"가 지난 토요일 4회차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서울시의 후원으로 러빙핸즈와 공동으로 진행한 이번 상영회에는 총 70여 명(누적)의 참가자들이 함께하며 인종과 문화적 차이의 벽을 넘어서는 영화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 6회 모기영은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답니다. 이제 곧 공식 트레일러와 포스터, 그리고 최종 라인업도 만나보실 수 있을텐데요! 아직까지는 조용한(?) 모금상황을 지켜보며, 실행위원들은 마음을 졸이면서도 믿음의 크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늘 그랬듯 필요한 만큼의 재정이 가까스로 채워지고, 모기영이 그 걸음을 이어가기를 응원하는 손길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거라구요. 물론 일찍이 후원으로 응원해주신 분들께 진심 다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비로소 가을 다운 바람을 만끽하며, 안도의 숨을 쉬어봅니다. 수고로이 보낸 우리의 뜨거운 여름들을 위로하는 자리, 6회 모기영 '곁의 얼굴'을 기대해주세요 :)
글 장다나, 강원중
편집디자인 강원중
2024년 9월 23일 월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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