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나요?
저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재즈레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집 정리는 왜 이리 힘든 걸까요? 바쁘게 지내야 하는데 한 없이 늘어지기만 하는군요. 구독자 님들께서는 모두 활력가득한 힘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
그럼 오늘의 재즈레터를 써 내려 가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재즈는 정말 여러 얼굴을 우리에게 내밉니다. 물론 여러 얼굴을 가졌더라도 심장은, 몸통은 재즈지 라고 말할 수 있던 시대가 있었다면, 요즘엔 몸통마저도 헷갈리죠.
이제 재즈는 그 만큼 천의 몸뚱이와 그보다 더 많은 얼굴을 가진 셈이 됩니다. 그렇게 다양한 Diversity 를 가졌음에도, 재즈는 왜 이토록 마이너일까요?
어떻게 보면 마이너한 모든 장르를 모아 하나의 통에 쏟아 넣고 나면 어느덧 재즈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걸까요?
처음 재즈가 태어났을 때 그러했듯, 재즈란 획일적인, 통제적인 기존 개념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던 발산일까요?
그 거대한 방향의 통 속에서 다시 하나의 사조가 되고 규범이 되었다가 마침내 다시 여전히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숙명때문일까요?
재즈는 정말 여러가지 옷을 자유롭게 갈아입습니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메타버스 시대에 재즈야말로 완벽한 미디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들에게서 돌파해 나오는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그것들은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이든 물러섬이 없고, 마침내 무엇이든 뚫어내는 짓밟혀도 끄떡없는 진리에의 의지죠. 타협과 관철은 사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우리가 어느 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나는 타협을 하고 하나는 관철하고야 마는 것이죠. 뭐 둘 중에 어떤 쪽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각자에게 달렸지만요.
재즈는 언제나 관철하고야 마는 쪽이었던 걸까요?
그래서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실은 언제나 듣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재즈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걸까요?
힙합 신에서 이제는 모를 수가 없는 빈지노도 한때는 비주류 래퍼였습니다. 초기에 그가 원래 듀오로서 그룹 이름 Jazzyfact 로 활동했던 것은 꽤나 알려져 있습니다.
재즈가 여러 장르에 반드시 영감을 준다는 것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클래식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의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중 제가 가장 즐겨 듣는 Glenn Gould 역시 재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연주 녹음 중 허밍을 하기도 하고 그것이 고스란히 앨범에 실리기도 했거든요.
재즈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고 있는 모든 음악활동의 베이스입니다. 재즈의 기본인 싱커페이션 Syncopation – 당김음- 역시 우리 모두 하고 있으니까요. 익숙한 멜로디를 마음대로 흥얼 거리다 보면 이리저리 늘이거나 하게 되지 않나요? 각자의 스타일 대로 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재즈란 이름으로 장르화 되어버리기 이전에, 우리는 벌써 ‘재즈’이전에 ‘재즈’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재즈를 듣다가 종잡을 수 없어 어렵게 느껴지는 감정이 사그라 듭니다.
“아우 이거 왜 이렇게 어려워?”
무작정 참고 듣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건 이 사람의 느낌…!”
쿨하게 넘길 수 있게 되죠.
재즈는 그런 음악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빈지노의 재지한 힙합을 들어보죠.
재지팩트의 ?. ! 물음표와 답이 오늘의 결론을 대신하는군요.
Never judge a book by the cover!
어떤 음반이든 일단 듣고 나서 얘기해야겠습니다.
다음 레터로 만나요.
우리 같이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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