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레터#54 | 인디 레이블을 혼자서 9년째 운영하는 마음 / 하박국

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입니다. 일 때문에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제가 궁금해서 먼저 연락하기도 하고요. 언제부터 이랬을까, 생각해보니 2010년 전후로 자주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는... 네. 트위터랑 페이스북이 막 뜨던 때였고 저는 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사람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네요. 

그 즈음에 만난 사람들 중에 하박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영기획이라는, 전자음악에 특화된 레이블을 혼자 운영하고 있어요. 이 레이블을 통해 사람12사람, 신해경,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 퍼스트 에이드, 동찬, 룸306 등 인상적인 아티스트들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올해 9주년이 되었습니다. 

9년간 혼자 사업체를 기획하는 게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습니다. 레이블을 운영하는 하박국은 프리랜서 칼럼니스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을 부탁했어요. 예정보다 빨리 원고를 마감하면서 하박국은 "그때 우진님이 조만간 전자음악의 시대가 올 거라고 했는데, 9년 째 안 오고 있네요..."란 말을 남겼네요.

모른 체 했습니다.

오늘 첫 곡으로는 사람12사람의 "빗물구름태풍태양"을 골랐어요. 2014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으로 일할 때 진행한 '한국의 일렉트로닉 특집' 시리즈 중에 한 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영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음악이라서 골랐습니다. 새삼, 영기획은 이런 음악을 소개하는 레이블입니다.

어쩌다보니, 영기획 9주년 / 하박국

물건 하나를 사기 전 리뷰를 10개 넘게 찾아본다. 산 물건은 매뉴얼을 건성으로라도 한 번은 읽어보고 사용한다. 나는 무쇠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직성이 풀리는 안전제일주의자다. 2012년 인디 레코드 레이블을 만들기 전에도 도움이 될 자료가 있는지 찾다 붕가붕가레코드에서 쓴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읽었다. 한국에서 주체가 직접 쓴, 인디 레코드 레이블 일을 다룬 유일무이한 책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재밌었지만 내 케이스와 워낙 달라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무엇보다 영기획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처럼 어마어마하게 히트 한 음악가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코끼리 꼬리 만지는 심정으로 더듬더듬 레이블 일을 하다 어느 날 이 책을 만났다.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인디 레이블도 넓게 보면 저자(음악가)의 원고(음악)를 다듬어 책(음반)으로 내놓는 출판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을 읽고 끌린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일본의 1인 출판사를 찾아 취재하고 인터뷰한 이 책은 매뉴얼을 찾은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여기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하면 나도 편하고, 내 어쭙잖은 생각을 늘어놓는 것보다 구독자에게도 더 도움이 될 거로 생각되지만… 아뿔싸. 하헌진님이 이미 뉴스레터에 비슷한 글을 썼네...) 어쩔 수 없이 바로 감상을 전한다.

책을 읽고 느낀 건 크게 두 가지다.

음, 내가 하는 거랑 별반 다를 거 없는데? 그렇다. 일본은 한국보다 큰 시장이지만 그렇다고 소규모 음악 또는 출판 산업의 개별 규모가 한국과 비교해 어마어마하게 크지는 않다. (대신 개별 사업자의 수는 한국보다 많다) 책에 등장하는 1인 출판사의 일부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나름의 타협점을 찾으며 만들고 싶은 책을 소규모로 제작한다.

음, 그렇다면…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지 모르겠는데? 책을 읽고 가장 상쾌해진 건 책 속의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걸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은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그 담백한 감각은 버리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

이를 무조건 낭만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들 그렇듯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을 열 가지 이상 해야 하고, 매일 자신이 가진 것 내에서 최선을 뽑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한다.

내 경우는 레코드 레이블 운영, 프리랜서 작가 둘 다 불안정한 일이기에 겨우 하나의 줄을 타다 떨어질 듯하면 다른 하나의 줄을 타는데 그마저도 휘청휘청하기 일쑤인 곡예사가 된 기분이다. 하나의 일이 밀려 다른 하나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 그럴 때면 자괴감에 당장 곡예를 멈추고 아침마다 출근 버스를 타고 싶어진다.

9년 차 인디 레코드 레이블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의 마음가짐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받았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마음을 적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사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장 자리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을 파악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옆에서 자꾸 ‘크리에이터가 되야 한다’. ‘뉴스레터가 중요하다’ 같은 말을 해대면 ‘여기서 뭘 또 더 만들라는 거야?’라고 대꾸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구입하고 혼자 편집을 배워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유료 구독자 수가 얼만지 귀동냥 하며 뉴스레터를 준비한다. 올해 하반기에 발매될 음반이 다 끝내줄 거라고 호언장담하면서도 한쪽에서는 제작비를 줄일 방법을 궁리하고 대출을 알아본다.

9년 동안 일하며 늘게 된 것 하나는 입으로는 구시렁거려도 손과 발은 어느새 움직이게 된 거다.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에 등장한 출판사들 역시 매일 비슷한 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책에 등장한 1인 출판사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건 매일 의심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내게 큰 용기를 줬다. 나도 내 방식대로 살아남으면 다른 이에게 무쇠 다리는 아니더라도 나무다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쩌다보니 9주년이 지났다. 9년이라는 시간동안 늘 또는 잠깐이라도 함께 해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P.S.
고료 받고 쓰는 글에 홍보까지 하자니 좀 민망하지만, 그게 나 같은 1인 인디 레코드 레이블 운영자가 사는 법이라고 스스로 격려하며 이제 막 1호를 보낸 영기획 뉴스레터 '음악 단어 편지'를 홍보해 본다. 구독, 좋아요, 알림 중에 구독만 해주셔도 좋습니다. 🤘 | 하박국 (영기획 대표)

오늘 끝 곡은 룸306의 노래입니다. 사람12사람과 마찬가지로 영기획이 소개한 음악인데, 러프하게 혹은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전자음악과 재즈가 융합된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앉아요, 가져오셨죠..."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가사가 어딘지 재미있고 따뜻합니다. (혹시... 당근이세요?) 그런데 곧이어 "안녕히 가세요, 이름 모를 그대.... 다시 볼 일 없는 당신 얼굴 뒤"라는 가사가 주는 쓸쓸함과 임팩트도 있고요. 

인연이라는 거요, 어쩌면 매우 쉽게 시작되는 일일지 몰라요. 어려운 건 그 다음, 계속 만나는 일인 것 같거든요. 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사람이든 일이든 마찬가지로요.

저는 요즘 누군가를 꾸준하게 만나는 것, 어떤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겐 목적지가 중요할까요, 방향이 중요할까요? 요건 구독자님에게 숙제로 남겨둘게요. 😉

앞 글에서 인용된 "매일 함께 걸어가다보면 어떤 풍경이 보일지도 모르잖아요.”라는 말을 곱씹어보는 밤, 말 많고 고독한 디제이였습니다. 

📻밤레터의 미드나잇 선곡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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