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레터#59 | 구독자님에게 일은 몇 번째인가요? / 장재열

얼마 전엔 '여름이었다'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뭐라뭐라 말한 다음 마지막에 '여름이었다'를 붙이면 괜히 아련해진다는 건데요. 꽤 웃겨서 저도 많이 써먹었습니다.

그러게요, 별 거 아닌 일 뒤에 별 거 아닌 문장을 붙이는 걸로도 추억에 잠기고 촉촉해진다는 게 킬링포인트죠. '뉴스레터를 보냈다. 여름이었다.' '점심으로 선지해장국을 먹었다. 여름이었다.' '삼일 째 야근을 했다. 여름이었다.'

야근러들, 힘내시고요. 😭 

첫 곡은 올라퍼 아르날즈와 라이 엑스의 곡을 골랐어요. 황량한, 그러나 어딘지 촉촉한 느낌의 곡인데요, 해안도로를 따라 걷거나 운전하면서 들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어쩌면 황무지 같은 곳도 어울리겠네요. 공유한 버전은 음악이 바로 나오는데, 원곡의 뮤직비디오는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롱 버전입니다. 단편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도 함께 보세요.

구독자님에게 일은 몇 번째인가요? / 장재열

“두 가지 다 걱정이에요.”

상담을 받으러 온 그는 상당히 똑부러지는 인상의 30대 여성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욕심도, 실력도 있는 사람이었지요. 오히려 그래서 다음 스텝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해보고 싶은 일, 그리고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일. 두 길은 모두 매력적이었거든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30개월 플래닝의 실제 사례자 이야기입니다. 연구소에 재직 중인 석사 출신의 그는 자신만 제외하고 모두 박사인 직장 환경이 참 버거웠답니다. 안정적이고 칼퇴하는 분위기는 좋았지만 주요한 프로젝트를 맡기도 어렵고, 언제나 보조인력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박사과정을 진학하고, 늘 한 명의 전문가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깊이 소망해온 일은 ‘요리연구가’였다고 해요. 요리책을 내고, 요리법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것 보다 훨씬 가슴 뛰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두 갈래 길에서 도무지 선택할 수 없었어요. 그런 그에게 ‘30개월을 그려보는 건 어때요?’라고 말했을 때, 막막한 듯 설레어하는 눈을 기억합니다.

플랜 A ‘지금 직장을 다니며 박사를 따고, 더 좋은 연구소로 이직하며 요리는 취미로 하기’와 플랜 B ‘지금 직장을 다니며 요리사 자격증을 따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요리책 출간의 기반을 다진 뒤 퇴사하기’로 나누었습니다. 소요 비용, 월별로 해야할 일, 장애요인 까지 엑셀 시트에 빼곡히 써넣은 그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어느 쪽이 막연한 바람이고, 어느 쪽이 진짜 열망하는 것인지 알겠어요. 선택이 명확해지네요.’라고요.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냐고요? 그건 노코멘트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는 결실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 중’이거든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명료하고, 불안하지 않은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저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일과 삶에 조금은 도움이 될 만한 씨앗들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고 보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요?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고요, 소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네요. 또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이야기도요. 어떤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을까요? 아마 구독자님이 처한 상황, 커리어의 단계, 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각각 달랐을 겁니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을 수도, 전부 다 내 얘기 같았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가 이 레터를 통해 전해 드리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위에 열거한 커리어에 대한 팁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결국 수단, 방법을 넘어서지 못하거든요. 그럼 무엇을 말하고 싶었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두 번째로 중요하다’였어요. 일의 가치관을 되짚어보는 것도, 30개월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동료와 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도 결국 ‘내 마음과 삶’을 위한 행위들이거든요. 지난 레터들에서 제가 전해드린 것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내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내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게, 내 기분이 평안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요?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밤, 저의 ‘기고하는 일’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의 밤은 계속됩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일’을 멈추는 순간이 오겠지요. 지쳐서일 수도 있고,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변신을 위해서, 사람에 질려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잊지 마세요. 일이 멈추어도 우리의 삶은 멈추지 않고, 우리의 존재 가치는 빛이 바래지 않는다는 걸요.

여러 밤 동안, 즐거웠습니다. 장재열이었습니다. |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재열님, 고마웠습니다. 오늘 선택한 끝 곡은 피비 브리저스의 "Funeral"입니다.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은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노래한 경험을 담은 곡이에요.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우울증과 정신건강에 대해 고백합니다.

"맙소사, 난 항상 우울해. 그게 바로 내가 느끼는 감정이야.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난 항상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Jesus Christ, I'm so blue all the time. And that's just how I feel. Always have and I always will. I always have and always will."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체로 나쁜 상태에 놓입니다. 나빴다가 조금 좋았다가 조금 나빠졌다가 또 조금 나아졌다가를 반복하잖아요. 그래서 박초롱 대표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잘 껴안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지 몰라요.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여름이었다.'처럼 괴로운 감정 뒤에 별 거 아닌 문장을 붙이면서요.

사실, 저 놀이의 핵심은 뭐든지 '과거형'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구독자님, 응원하고 있어요. 

일 많고 고독한 밤, 여름이었다.

📻밤레터의 미드나잇 선곡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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