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는 어떤 원고를 책으로 만들까요. 많은 사람이 문장력을 먼저 떠올립니다. 문장이 매끄럽고 구성이 잘 갖추어진 글이어야 책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글을 잘 못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이름이 적힌 책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출간을 결정하는 사람은 실제로 원고에서 무엇을 볼까요. 출판사 대표는 어떤 원고 앞에서 이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을까요. 생각의 숲의 책을 함께 만드는 출판사 느린서재의 최아영 대표님께 서면으로 열여덟 개의 질문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답 가운데 한 문장은 그 짐작과 반대였습니다.
"거칠고 날것의 원고가 더 끌립니다."
느린서재는 생각의 숲 1기 작가들의 책 《십 대가 지구를 구하는 방법》을 펴냈고 지금은 2기의 책 《십 대가 학교를 구하는 방법》을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원고를 어떻게 고르는지, 원고가 어떤 길을 거쳐 책이 되는지, 십 대의 원고를 왜 책으로 만들었는지 물었습니다. 대표님의 답은 거의 그대로 옮깁니다.

시간을 가득 채우는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Q. 처음 뵙는 독자분들께 대표님과 느린서재를 소개해 주세요. 어떤 책을 만드는 출판사인가요.
안녕하세요. 느리게 읽는 시간을 선물하는 느린서재입니다. 느린서재는 약자의 이야기, 환경 이야기,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찾아 책으로 만들고 있어요.
Q. 출판사를 직접 차리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떤 순간에 '내 출판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셨나요.
출판사를 차리기 전에도 계속 출판사에서 일해 왔어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에 이런저런 준비를 거쳐 출판사에 입사를 했죠. 여러 장르의 책을 만들어 보고, 여러 작가들과 함께 일하는 경험을 쌓았어요. 코로나 시기에는 아이를 돌보며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을 했고요.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기보다는 의뢰인의 요청이 우선이더라고요. 그때 마침 제 손에 들어온 원고가 있어서 저자분과 으쌰 으쌰 힘을 합쳐 출판사를 만들게 되었어요.
Q. '느린서재'라는 이름에는 어떤 뜻을 담으셨나요. 빠른 것들이 이기는 시대에 '느린'을 앞에 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유행에 따라 책이 만들어지고, 책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것이 마음 아팠어요. 그래서 시간이 오래 흘러도 기억에 남는 책, 금방 소비되고 잊혀지는 책이 아닌 시간을 가득 채우는 책을 만들고 싶어서 '느린서재'로 이름을 정했어요.
Q. 느린서재가 '이건 우리 책이다'라고 느끼는 원고는 어떤 원고인가요.
읽고 나면 불편해서 뭔가 행동하게 만드는 이야기, 생각의 변화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이 느린서재가 찾는 원고입니다.
느린서재가 찾는 원고의 조건은 다 읽은 뒤 독자에게 남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 원고 하나가 완성되기까지는 2년이 넘게 걸리기도 합니다.
원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가장 오래 걸려요
Q. 한 편의 원고가 느린서재에 도착해서 서점 매대에 오르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먼저 만들고 싶은 책을 기획합니다. 그 후에 기획안에 맞는 저자를 섭외해야 하죠. 저자 섭외를 하면서 거절을 당할 수도 있기에 저자 후보를 여럿 두기도 합니다. 제일 처음 후보로 둔 저자와 계약이 성사되면 참 좋지만, 일이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후에 원고를 작성하게 되고, 편집자는 첫 독자로서 피드백을 드리며 같이 원고를 수정해 나갑니다. 그 후에는 원고를 가장 잘 살릴 수 있게 디자인을 하고요. 여러 시안들을 거쳐 디자인이 최종결정되면 디자이너와 상의해서 종이와 책의 제작 사양들을 결정합니다.
인쇄소에서 책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에는 서점 매니저들과 부수 상담을 진행합니다. 책의 컨셉을 이야기하고, 어떤 마케팅을 할 건지 의논한 뒤 서점으로(교보문고, 예스24 등) 책이 들어가게 되지요.
Q. 많은 원고 중에 출간을 결정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요. 문장력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무엇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원고를 읽은 뒤, 여운이 오래 남는 이야기를 선택합니다. 이런 책이라면 누군가의 하루를 다르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원고를 선택해요.
Q. 편집자의 일은 원고를 '고치는' 일이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어떤 원칙을 갖고 계신가요.
저자의 색깔을 더 잘 살릴 수 있게 수정하려고 해요. 밝은 목소리는 더 깨끗하고 담백하게 만들고,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독자가 생각할 여백을 줄 수 있게 원고를 수정해요.
Q.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가장 힘들거나 오래 걸리는 구간은 어디인가요.
원고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가장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만들고 싶은 책의 주제가 정해지고 컨셉이 정해진다고 해도 저자가 원고의 물꼬를 틀지 못하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까요. 또 전체 원고를 작성하는데 있어 거의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써둔 원고를 컨셉이나 이슈에 맞게 수정하는 과정도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하나의 완성된 원고를 만드는 과정이 출간에 있어 핵심이니까요.

오래 걸려 완성한 책이라고 모두 독자를 만나지는 못합니다. 출판이라는 일에는 그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책이 독자에게 가닿지 않을 때가 가장 슬퍼요
Q. 지금까지 만난 작가나 책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나요.
《느리게 산다》 책의 저자분들을 직접 뵈었을 때가 기억이 나요. 저자분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소박하지만 우아하게 사시는 그분들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더불어 제로웨이스트의 삶을 실천하고 계셨는데, 무척이나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Q. 《1인 출판사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책을 공저로 내셨지요. 출판이라는 일의 슬픔 하나와 기쁨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출판이라는 일의 기쁨은 책을 만드는 모든 공정에 편집자의 의견과 취향이 반영이 되는 주체적인 일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슬픔이라고 한다면, 좋은 이야기와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독자들에게 그 책이 가닿지 않을 때, 그때가 가장 슬프죠.
Q.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과 그만두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도서전에서 만난 독자가 따로 편지를 줄 때가 있어요. 느린서재 책에 대한 애정을 담아서요. 왠지 팬이 생긴 거 같아서 기뻐요. 그리고 때로는 "이 책 정말 좋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독자들을 만날 때면 느린서재를 만들길 잘했구나, 싶어요. 이런 순간들 때문에 그만두지 않고 책을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십 대들의 생각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Q. 십 대의 원고에 정식 출간이라는 지면을 내주는 건 출판사로서 흔치 않은 결정입니다. 생각의 숲을 함께 하기로 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십 대들의 생각이 너무나 궁금했어요. 성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낼 기회가 많지만, 십 대들에게는 그런 기회도, 시간도 없으니까요. 공부에만 매몰된 십 대가 아닌 다양한 생각을 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십 대 저자를 찾고 싶었어요.
Q. 《십 대가 지구를 구하는 방법》을 만들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십 대 작가들의 원고는 성인 작가의 원고와 무엇이 다르던가요.
기후위기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어떻게 원고에 녹여낼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원고를 받고서는 많이 놀랐어요. 완성도가 너무 훌륭했거든요. 특히 김선명 작가의 원고는 거의 흠 잡을 데가 없어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나요.

Q. 출판사의 눈으로 볼 때 '책이 될 수 있는 원고'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지금 《십 대가 학교를 구하는 방법》을 퇴고하고 있는 2기 작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자신만의 생각과 의견이 뚜렷한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죠. 누군가의 생각을 베낀 것이 아닌, 내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서 얻은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Q. 요즘 출판계에 AI로 쓴 책 논란이 많습니다. 한국 출판계도 얼마 전 'AI는 도구, 저자는 사람'이라는 원칙을 발표했고요.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사람이 쓴 글'의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느린서재는 책을 만드는 모든 순간을 사람이 직접 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기획부터, 원고 집필과 수정, 그리고 디자인 작업까지 말이죠. AI가 인간을 흉내내고 어쩌면 인간보다 더 글을 잘 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인간이 만들어낸 거칠고 날것의 원고가 더 끌립니다. 너무 매끄러워서 술술 읽히는 원고보다, 인간만이 쓸 수 있는 불편하고 날카로운 글이 더 매력적이고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Q. 느린서재의 다음 계획이 궁금합니다. 생각의 숲과 함께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다면 살짝 들려주세요.
십 대들의 책을 꾸준히 내고 싶어요. 《십 대가 ○○를 구하는 방법》을 지나 다른 주제로도 십 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을 만들 생각이에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십 대들의 진짜 생각이 너무 궁금합니다.
책 읽으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Q. 이 뉴스레터의 독자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아이의 읽기와 쓰기를 지켜보는 부모님들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도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는 강제로 되는 영역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강제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고요. 책과 더 멀어질 수도 있어서요. 가장 좋은 방법은 엄마나 아빠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책 읽으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대신 부모가 읽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세요.
Q. 마지막으로 느린서재의 책 가운데 '이 한 권만은 꼭 읽어 보셨으면' 하는 책을 꼽아 주세요.
느린서재의 스테디 셀러 《문학처방전》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아픈 환자들에게 문학을 처방해주는 약국, 용인의 일리치 약국에서 진행한 처방전 프로그램인데요. 먹는 약 대신 소설이 어떻게 우리에게 처방전이 될 수 있을지 안내하는 책입니다. 차례에서 찾아보세요. 나에게 필요한 소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느린서재의 책은 알라딘 출판사 목록과 인스타그램 @calmdown_library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나온 문장이고 읽은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질문지를 쓰며 출간을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느린서재가 원고를 고르는 '읽고 나면 불편해서 뭔가 행동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여운이 오래 남는 이야기'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느린서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마지막 쪽을 덮은 뒤의 독자라는 것도요.
모든 책은 저자의 생각이 독자의 생각과 만나는 순간을 위해 존재하지요.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서 얻은 이야기'와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가치 있는 이유일 겁니다.
글쓰기와 출간에 관심 있는 십 대와 부모님들이 오늘 인터뷰로 출간을 두고 품었던 궁금증을 풀었기를 바랍니다. 많은 질문에 정성껏 답해 주신 최아영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느린서재와 함께 만드는 '십 대가 ○○를 구하는 방법' 시리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느린서재와 함께 만들고 있는 2기의 책 《십 대가 학교를 구하는 방법》이야기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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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다룬 자료:느린서재 최아영 대표 서면 인터뷰 (2026년 10월)
김혜원 · 생각의 숲 편집장《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내 이름을 찾기로 했다》 저자 · 《십 대가 지구를 구하는 방법》 공저/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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