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프런트 앤드 개발자라고!

직장 다니면서 내 사업 하는 법 2화

2022.07.05 | 조회 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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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한 시간을 쏘아 봤을까? 두 시간을 째려봤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 주화입마에 접어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은 두어 시간이 흐르도록 알아낸 정보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 넣어야 할 한글 파일엔 여백만 한가득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팀장이 지시한 버그 이슈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상태. 이 일도 못하고 저 일도 못해낸, 이도 저도 아닌 증류수와 같은 상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지나친 비관 예찬론자다. 선은 언젠가 악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내가 악을 종교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악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득세하는 중이고, 내가 그것에게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그것을 단지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면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비교적 삶이 무탈하게 비칠지는 몰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온갖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남아 있는 세상은 온통 전통적인 악과 잔혹한 악이 집어삼켜버린 나약한 악뿐만이 부유물처럼 떠다닌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긍정적이지 않으며 당장 내일이란 것도 우리에겐 우아한 불투명함 만이 존재할 뿐이다. 당장 오늘 점심시간만 예측하더라도 나는 또 경쟁자들에게 쉽게 뒤처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 보잘것없는 식당에서 원하지 않는 메뉴 따위, 그러니까 콩자반을 곁들인 꽁치 정식을 먹게 될 공산이 아주 크다. 나는 그 순간 군대의 조반이 생각났다. 

아침마다 예의 식판 위에 오르던 그 콩자반과 아무리 뒤져봐도 살 덩어리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꽁치 뼛조각들의 향연을. 제안 요청서를 심사숙고해야 할 시간에 왜 군 시절의 조반과 맛대가리 없는 콩자반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악연과 악연은 교차 편집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아 짜증 나!”

나도 모르게 냅다 비명을 질러버렸다. 가엽게도 칸막이 앞에서 졸음과 사투를 벌이던 김대리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고 말았지만...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또 안이사가 이상한 일이라도 시킨 거야? 왜 그래?”

“아니. 별안간 불러내더니 제안 요청서 뭉치를 던져주는 거야. 게다가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거야. 자긴 정보가 없대. 그러니 나더러 직접 기관에 전화를 하든 이메일을 보내든 어떤 방식으로는 출구를 찾아보라고 하더라. 아니 정답은 못 가르쳐 주더라도 질문을 제대로 던질 만한 힌트는 줘야 할 거 아냐. 안이사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고 윗선에서 오늘 아침에 전달받은 것뿐이래. 적임자가 나뿐이었다나? 아니 대체 왜 나인 거야? 김대리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이야?”

“김대리 네가 알다시피 나는 뼛속부터 개발자잖아. 비주얼 스튜디오나 만지작거리던 내가 무슨 제안 요청서냐고. 대체 어느 시절부터 개발자가 제안서 작업에 뛰어들었단 말이야. 지금 개발자 뽑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지? 지금 백엔드 개발자는 아예 품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내가 얼마나 귀한 몸인데 말이야. 까까오 건 네이뻐건 회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내가 그런 분이라고.”

"근데 너는 프런트엔드 개발자 아니냐?”

"아니 말이 그렇다고. 내가 백엔드 개발자가 아니라고 해서 갈 데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야. 우린 개발자라는 직업에 명예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그깟 문서 따위, 종잇조각으로 예술을 부린다고 허풍을 쳐대는 기획자들의 글자 나부랭이 농간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가짜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행위 예술 따위에 심취해서는 곤란하잖아. 개발자 자존심이 있지. 우리는 코드로 승부하는 부류라고.”

“난 이런 게 진짜 적성에 맞지 않다고. 사람이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잖아. 내가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고 Lady Gaga가 입는 그런 별난 옷을 차려입고 무대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개구리는 개구리 연못에서, 가물치는 가물치 늪에서, 개발자는 비주얼 스튜디오가 만든 적당한 풀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안 그래?”

“그래 홍대리 말이 맞아. 우리에겐 글자가 가득 담긴 매뉴얼보다는 코드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긴 하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문서 작업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썩고 있냐고. 나는 당장 어제 아침에 헤드헌터가 이력서를 업데이트해달라는데 아주 곤욕을 치렀잖아. 세상에 나를 이력서 한 줄로 표현하라는 거야. 아니, 세상에 어떻게 나를 한 줄로 표현해? 내가 다룰 수 있는 랭귀지만 열거해도 대충 100줄은 넘을 거야. 아무튼 그 헤드헌터는 이력서를 단 한 줄로 표현해달라고 하더라고. 아마도 그냥 “이력서”라고 다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한 줄로 강조했으면 하는 바람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너무 힘들어. 내가 누구인지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나도 동감해. 그래서 짜증 나 미치겠어. 나 그냥 이 회사 때려치워버릴까 봐. 이력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안 요청서를 분석할 게 아니라, 당장 이력서부터 업데이트해야겠어. 며칠 전에 내가 노션에 이력서를 만들어 뒀거든, 당장 거기에 접속해 봐야겠어.”

“알았어, 알았다고 문서 작업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지금은 업무 시간이니까 이력서 정리는 나중 일이고 그만 투덜거리고 잠깐 같이 서류를 검토해 보는 건 어때? 마침 내가 좀 전에 커밋을 해놔서 시간이 좀 날 것 같아서 말이야”

“김대리 그래? 잠깐 시간 내 줄 수 있겠어? 회의실은 내가 예약해놓을게. 기다려봐.. 음.. 장미룸이 마침 예약이 없네. 내가 바로 여기 2시간만 예약해 놓을 게. 김대리! 마음 바뀌기 전에 바로 가자고. 4시까지만 도워줘.”

김대리 역시 제안서를 써본 경험은 없다. 그러니 우린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자고 의기투합한 생쥐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얼간이가 머리를 싸매고 회의실에 앉아서 제안 요청서를 꼼꼼히 분석한다고 한들, 예의 이야기는 버그 쪽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서 작업 따위는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써주는 세상이 아닌가,라고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가, 결국 우리 개발자의 운명도 인공지능에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모아졌다. 김대리도 나만큼 염세적인 인간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비교적 코드가 잘 맞는다.

"자, 그러니까 일단 제안 요청서의 목차부터 정리해 보는 거야. 일단 사업의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예산을 검토해 보자고. 음, 그러니까... 기술적인 부분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떠벌이면 되는 거네?"

"그렇지! 그거야. 기술적인 부분과 사업적인 부분을 풀어쓰면 되는 거지. 그런데 풀어쓰려면 뭐 요지가 있어야 하잖아. 핵심이 대체 뭐냐고 나는 이 사업의 핵심이 뭔지도 분간할 수 없겠는걸? 이러다가 아무 결론도 못 내고 예약시간만 끝날 것 같아"

"아, 잠깐만 팀장이 깨톡으로 찾는다. 어제 긴급 이슈로 등록됐던 버그가 커밋됐는지 물어보네. 나 가야 할 것 같아. 홍대리 미안해.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다시 찾아보자고. 미안해. 고민 좀 해봐. 다음에 또 봐~ 혹시 자료 입수한 거 있으면 보내줘. 내가 따로 검토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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