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두루미

초단편 소설

2023.05.04 | 조회 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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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내가 두루미를 만난 것은 어느 뜨거운 여름날의 청계천 부근이었다.

“후… 참 오래도 살았어. 질긴 인생이야…” 두루미는 담배 연기를 공중에 버섯 모양으로 뱉어내며 말했다.

“오호! 말하는 두루미라니 제법인걸! 거기다 건달 두루미?”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렴 바보 천치가 대통령도 하는 세상인데 두루미가 한숨을 내쉬든, 담배를 피우든 무슨 상관이랴. 멋진 재료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인걸.

“아저씨, 내 말 좀 들어보실라우?” 건달 두루미는 뭔가 털어놓을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장하게 나를 쳐다봤다.

건달 두루미가 들려준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두루미와 여우의 우화다. 이야기야 워낙에 유명하니, 모자라는 지면에 구구절절 에피소드를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다만, 건달 두루미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는 우화와는 다른 양상으로 촉발된, 말하자면 기묘한 형태였던 것이다.

건달 두루미는 가문의 오래된 앙숙인 여우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며 그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사랑 때문에 어떻게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는지 기구한 자신의 종족의 일대기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마치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되어 디티람보스를 보여하듯이 뭔가에 홀려 연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잘 알다시피 여우와 두루미는 철천지원수 지간이 아닙니까? 우리는 여우 가문과 오래도록 앙숙으로 지내왔지요. 우리 선조 님이 여우에게 수모를 당한 이후로 우린 곰의 쓸개를 질겅질겅 씹어가면서 복수의 나날을 꿈꿨답니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앙갚음을 인간 모르게 천년을 넘게 지속해 왔지요. 소설 쓰는 선생님은 아마도 그 스토리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황학동 도깨비시장에서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리고 내가 소설 쓰는 사람인 줄은 어떻게?”

“그거야 겉모습만 봐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복수란 게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하지 않습니까? 기껏 접시나 호리병에다 양쪽에게 불리한 음식을 접대하는 꼴이라니요. 솔직히 우리 우월한 두루미 종족에게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 날개가 충분히 손 역할을 한다고 부연 설명을 했음 -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 시대에, 그깟 접시에 수프를 담아준다고 그걸 머저리처럼 입맛만 다시고 있겠냐 이겁니다. 빨대를 쓰던, 그걸 다시 호리병에 깔대를 꽂아 넣던, 그걸 마시는 건 어려운 미션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우린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이상한 프레임에 빠져서 천년을 넘게 얼간이 짓을 하고 살았다는 거죠.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복수의 사슬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녀와 제가 만난 것도 다 신의 계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녀와 우린 서로의 같은 생각을 서신으로 교한하다 인연이 된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그녀는 여우, 저는 두루미,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지요. 유전자도 다른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죄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국경이 없는 사랑은 인간만의 전유물인가요?”

“우리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만나서 사랑을 했지요. 물론 플라토닉 러브, 그런 거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눠서 혼종 같은 괴물을 생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가문의 내력에서 잠시 벗어나, 집안싸움을 좀 잊고 서로의 오래된 앙금을 씻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날이 쌓여가다, 싸움의 종지부를 끊어야겠다는 결정까지 내리게 된 거죠. 우린 양쪽 세력의 대표가 되어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을 하게 된 겁니다. 냉전 관계를 끝내고 화해무드를 조성하려고 했죠.”

“하지만, 정치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개인보다는 집단의 입장을 조금 더 고려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여우 쪽이든 두루미 쪽이든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더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저는 누가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인지, 그 원인으로 내달리고 싶었습니다. 누구든 선전포고 없이 싸움을 건 쪽이 있지 않았겠냐는 거죠. 그래서 저는 여우 쪽이 먼저 싸움을 건 거다. 비겁하고 비열한 짓거리는 여우 쪽에서 시작했다, 그러니 여우가 먼저 사과를 하면 우리도 사과하겠다,라고 선언을 한 겁니다. 그게 바로 역사적인 청계천 선언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자료도 충분했고요. 뜻하지 않게 그녀를 공격하는 꼴이 되긴 했지만, 따로 만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을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우 쪽의 대표로 나온 그녀 역시 소신을 굽히지 않더군요. 두루미가 언제 시비를 걸었는지 <교활한 두루미 놈들의 흥망성쇠사>라는 책을 들고 와서 증거랍시고 보여주더군요. 제가 그렇게 날조된 역사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양쪽에서 공히 신뢰할 수 있는 문건이라면 모를까, 두루미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왜곡시킨, 마치 뉴라이트 역사관처럼 날조한 책을 제가 믿을 수 있겠어요? 저는 그 순간 그녀와 연인 사이라는 건 잊고, 이건 자존심 싸움이야, 그녀가 아무리 내 연인이라고 해도 이건 질 수 없다, 이건 스러진 종족 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의견과 주장은 사라지고 상대방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게 되더군요. 저는 그녀의 약점, 그러니까 너희들은 인간에게 사육이나 되는 꼴로 전락한 동물원의 노리개 주제에 어디서 고결한 두루미한테 수작을 부리냐고 말했고, 그녀 집안의 약점과 그녀가 대학에서 허위로 기재한 논문 경력까지 들춰댔으며, 박사도 아닌 박사 수료를 박사 학위라고 내세우고 다니냐며 인신공격을 해대기 시작했어요. 역시 오래된 진리는 잘 먹히더군요. 냉철한 논리력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더라고요. 저의 날카로운 공격에 그녀는 곧 사기를 잃고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듯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저의 공격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죠. 그녀는 굳게 입술을 닫고 체념을 해서는 두루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재발 방지 약속과 악랄한 여우들의 진심 어린 사과, 모든 그릇을 접시로 대체할 것, 납작한 점시 따위들은 앞으로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제 발언이 이어질 때, 장내가 약간 소란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녀는 가해자답게 의견을 굽히고 우리의 조건을 모두 승낙해 줬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앞으로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며 양해 각서에 서명을 한 거죠. 집에 가는 길에 호리병을 구매하겠다는 약속까지…”

“뭐 여우와 두루미 간의 다툼은 그렇게 종료가 됐습니다. 우린 승리에 도취되어 거리에 뛰쳐나가 만세를 외쳤죠. 기나긴 전쟁이 드디어 끝나게 된 겁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저를 회피하기 시작하더군요. 전화를 하면 바쁘다, 일정이 없다. 회의 중이다, 이런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요. 저는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패배했으면 패배자답게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겁하게 피해 다니면 가해자의 역사가 사라진 답니까? 저는 분해서 될 대로 되라고 마음대로 하라고 그녀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역시 연락 없는 그녀를 뒤로하고 이렇게 청계천 돌다리 위에 앉아서 담배나 피우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여우와 두루미의 싸움도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녀석의 뒤통수를 세게 가격한 다음, 기다린 고개를 붙잡고, 비누 거품이 둥둥 떠다니는 물속에 몇 번을 잠수시킨 다음, 잽싸게 지하철역으로 도망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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