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일지

결제는 내가 했는데, 돈은 음식점과 카드사가 벌고, 밥은 변기가 먹어버렸다.

2022.01.15 | 조회 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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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김 레터

이불 밖은 위험한 시대, IT회사 디자이너가 쓰는 에세이

01

어제, 간만에 동료와 비싼 밥을 먹었다. 동료는 내 추천서를 통해 팀에 합류했는데, 인재 추천비가 입금되어 한 턱 쏘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함께한 회사 생활을 터놓으며 오마카세에 사케 한잔을 걸쳤다.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 집에 왔고, 영화나 보면서 잠들려던 찰나, 위에서 이상한 신호가 왔다.

‘방금 까지 먹은 것, 전부 다 토해내.’

탈이 난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밤새 구토를 했다. 아직 소화될 준비도 안 된 오마카세는 물론 점심까지 깡그리 비워내 버렸다. 속을 다 비우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쓸개즙마저 내 몸에 있기 싫었는지 몸 밖으로 나가려고 부단히 애를 써댔다. 탈이 났을 땐 수분 보충이 필요하다고 해서 게토레이를 사서 마셨는데, 쓸개즙과 색이 똑같아 보기만 해도 다시 토가 올라왔다.

결제는 내가 했는데, 돈은 음식점과 카드사가 벌고, 밥은 변기가 먹어버렸다. 생선은 죽어서라도 바다에 돌아가게 생기긴 했으니, 남 좋은 일은 다 한 셈이다.

02

시월이도 종종 토를 한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비닐이나 이상한 음식을 주워 먹으면 곧잘 토를 한다. 작고 연약한 생물이 토를 하는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그대로 배로 들어가 소화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기에 몸은 토를 요구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잘못 먹었다면 토해내야 한다. 억지로 씹은 불순물을 소화할 필요는 없다.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과정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삼킨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대로 소화하는 것에는 고통이 없다. 위에서는 위산이, 그 아래로는 창자와 배설기관이 일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소화되지 않은 불순물과 찌꺼기는 그대로 몸에 남게 된다.

03

잘못 삼킨 경험을 소화하려고 애쓰던 때가 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혹은 유혹에 이끌려 잘못된 길을 들어섰는데 멈추지 못하고 계속 나아갔던 날들. 그저 뒤를 돌아 되돌아가면 되는데, 지나온 날들을 토해내는 것이 아깝고, 고통이 무서워 그러지 못했다. 어찌 됐든 한 발씩 나아가서 소화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때의 나에겐 고통이 악이고 관성대로 따르는 것이 선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고통은 내게 조금 쓴 약이었고, 관성을 따른 대가로 지울 수 없는 병 같은 것이 마음에 남았다.

이미 삼킨 것을 뱉어내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본능이 일한 결과다. 위가 저절로 신호를 보내오듯이, 우리는 나쁜 경험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애써 무시할 뿐이다.

우리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더 자주 토를 해야한다. 본능이 그리하라고 알려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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