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이를 처음 만난 건 1988년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에 있을 때이다. 뭐 완전히 가깝게 지냈다고 하기엔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룹 부활이 해체한다는 소식에 함께 안타까워 하며 부활 노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2016년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다. 대뜸 자기는 신상훈이라고 하면서 기억하느냐고 했다. 내 페이스북을 보고 전화번호를 찾았다고 했다.
너무 반가웠다. 당시 해외 연수를 마치고 부산으로 복귀하다 보니 사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멀어져 외롭게 지내고 있던 참이었는데, 거의 30년 만에 나를 잊지 않고 찾아 준 상훈이가 너무나 고맙고 반가웠다.
그간 서로 연락이 없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부산에서도 만나고 나중에 서울로 근무지가 변경되고 나서는 부천, 인천, 영등포 등에서 자주 만났다.
특히 코로나가 유행하던 2020~2021년에는 대중 접촉을 피해 상훈이 작업실에서 자주 만났다.
지민이가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기꺼이 우리 딸 첫 번째 레슨 선생님이 되어주었고, 그걸 핑계 삼아 상훈이 작업실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간 못 다한 얘기를 밤새워 풀어 놓듯이 우린 그간 못 만난 한 풀이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주 만났고 함께 취했다. 특히, 우리 애들이 사춘기 질풍노도 하며 패악질도 서슴지 않던 그 시절, 그래서 집사람과도 관계가 삐걱거리던 그 시절, 상훈이 지하 작업실은 내게 피난처와도 같았고 내가 맘 놓고 숨 쉴 수 있는 해방 공간이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상훈이의 자유로움을 동경했던 것 같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기타 하나 둘러메고 전국을 누비는 그 자유로움. 회사에 목줄 매고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처지에서 보면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어디든 가서 숙식을 해결하고 저녁이면 현지에 있는 지인을 불러 거하게 술도 한잔 하는 모습이 그저 부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또한,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즉석에서 어떤 노래든지 척척 기타 반주로 흥을 돋우는 그 실력은 언제나 황홀했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는 내 입장에서 보면 상훈이는 그냥 아이돌 자체였다.
무엇보다 제일 부러운 것은 상훈이의 긍정적인 성격과 밝음이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우울감이 기본 감정으로 세팅되어 종종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상훈이는 우울한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상훈이랑 있으면 나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고, 같이 얘기 하다 보면 작은 것에 얽매여 전전긍긍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얼마전 '25.8.17(일) 상훈이 와이프 1주기 추모 음악미사에 다녀왔다. 와이프를 떠나 보낸 슬픔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친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어제 술 한잔하고 통화를 하다가 문득 상훈이에 대해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40대를 지나 50대 접어들던 그 시절, 상훈이는 나에게 가장 귀하고 고마운 존재였던 것 같아 글로 꼭 남기고 싶었다.
함께 나이 들어 가며, 나를 자신의 영역으로 기꺼이 초대해 주고 곁을 내주는 친구가 있어 오늘도 고맙다.
P.S. 음정/박자에 있어서 만큼은 상훈이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신 우리 엄마 찬송가 노래에 상훈이가 완벽히 반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ㅋㅋㅋ) 우리 엄마와 상훈이의 재시합(?)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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