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둘째 형과도 13살 차이를 두고 태어난 셋째 막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1934년생이신 아버지는 38살에 나를 낳으셨는데, 어머니는 이미 장성 한 형들 뒷바라지 한다고 농사철이 끝나면 주로 형들과 도시에서 지내셨다.

자연스레 나와 단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아버지는 나와 항상 함께 다니셨고, 무척 아껴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봄 날 아버지는 자전거를 사주셨다. 요즘처럼 다양한 디자인이 없던 그 시절 내 자전거는 뒤에 짐받이가 달린 검은색 삼천리 자전거였다. 하지만, 다른 자전거에 비해 날렵하게 생긴 대다가 짐받이 크기도 작아 나름 깔삼(?)했던 그 자전거는 동네 아이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나에겐 자랑의 대상이었다.

자전거가 생긴 후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던 등교 시간은 20분 정도로 단축되었고, 하교 후 자전거를 타고 옆 동네는 물론 평소에는 잘 가지 못했던 외진 곳까지 이곳저곳을 탐험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자전거를 사주고 1년 후 아버지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급성 간경화로 돌아가셨고 내 행복은 거기서 올스톱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전담하던 아버지가 안계시니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아버지 노동력의 부재는 어머니의 헌신과 10대 사춘기 소년의 노력으로 대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중학교 들어가니 머리가 트이고 초등학교 때보다 공부도 잘하게 되었는데,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집을 2번이나 방문해 농사를 시키겠다는 엄마를 겨우 설득한 끝에 나는 간신히 부천고등학교로 진학 할 수 있었다.(멀리 부천까지 가서 사비로 입학지원서를 사다주신 임상범 선생님은 지금도 너무 감사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나는 참으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사랑도 많이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의 십 대는 말 그대로 거세 당했다.

부천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골집을 나서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쉬운 마음에 대문 밖을 나서기 전 안채와 안마당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안마당 한쪽에는 어릴 적 아버지와 나의 추억이 함께 머물던 한두평 남짓 벽이 없는 지붕 구조의 물품 수리공간이 있었고, 거기엔 아버지가 사주신 검정색 삼천리 자전거가 우두커니 남겨져 있었다. 그 수리공간은 아버지 전용공간으로 아버지가 이것저것 집안 물건을 고치시곤 하던 곳인데, 거기서 내 자전거도 수리 해주시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거기서 혼자 펑크난 타이어를 때우고 있으면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곤 했다.

나의 삶에서 자전거가 갖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취미와 레저를 넘어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맞이하는 '자전거 탄 풍경'은 삶의 활력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나를, 과거와 현재를, 그 때의 슬픔과 오늘의 행복을 하나로 엮어 나를 온전한 지금의 나로 완성해 준다.

지금도 자전거에 올라 행복감을 느낄 때면 문득 문득 나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홀연히 떠나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돈을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행복을 물려주신 것은 아닌지...그게 아버지의 큰 그림이자 위대한 유산은 아니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