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작담이 통신] 좋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으로 하자

가구 보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며

2025.03.21 | 조회 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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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담이 통신

목수의 아무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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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지났네요. 공방 이름을 호작담이라 지은 지도.

공간 꾸리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던 때. 부동산을 50군데도 더 돌아다녔습니다. 도심에서 목공방 꾸리기 알맞은 공간 찾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소음에 무딘 주변 환경, 3미터 내외 길쭉한 자재가 드나들 수 있는 쭉 뻗은 출입구, 누수/ 누전 문제와 무관한 곳. 넓은 공간과 저렴한 월세라는 이기적인 바람 같은 것들이 넘실넘실 흘러넘쳤더랬지요. 그날도 공간 투어 마친 뒤 파김치 꼴이 되어 귀가 후 골골대며 드러누워 하릴없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번뜩. '공간 이름을 뭐라 짓지?'


 

 

모두에게 그렇듯 제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김 씨 성에 용호라는 이름이. 용 용(龍)에 클 호(浩) 자를 씁니다. 아빠가 지어준 이름. 어렸을 땐 내 존재에 관해 관심이 많았어요. 열 손가락 펼쳐 꼼지락 움직이는 모습 가만하게 보고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세상에. 머릿속으로 생각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눈앞에 곧바로 펼쳐지다니 신기하잖아요. 살이 말랑말랑해.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검은색과 이어지는 갈색의 그라데이션이 생경하고, 위아래로 눈꺼풀이 맞닿는 부분의 두툼한 살갗이 신기했어요. 제 이름도 신기했지요. 다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너무 흔한 이름. 글자의 생김새가 진부하다 여겼고, 서민의 삶 따위 관심 없이 탁상공론만 늘어놓는 무력한 국회의원에게 어울린다는 생각 들었거든요.

아빠에게 물었어요.

"내 이름을 왜 용호라고 지었어?"

"돌림자 맞춰서 지었어."

저는 아빠를 참 좋아했습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어보면 절대 한쪽의 편을 드는 법이 없었지만, 사실은 아빠가 더 좋았어요. 아빠의 말솜씨와 생김새, 행동 모두 좋아했지만서도. 이 대답만은 별로예요. 호기심 가득한 아들이 물어보면 좀 그럴듯하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한자 뜻을 풀이하면 '큰 용'이니 꾸며내기 이보다 좋은 이름이 또 있을까. 참고로 사촌 형의 이름은 '용성'이에요. 용성이 형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지. 큰아버지는 진짜 정말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분이신데. 어린 시절부터 만약 내 아이가 생기면 이름을 정성스럽게 지어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보다 더 정성스럽게 네 존재의 귀함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요.


 

 

공방을 꾸리기 전부터 출판사로 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회사 퇴사 후 이미 독립 출판을 몇 차례 한 터.  출판사 이름은 '어랏어스(a lotus)'였어요. 진흙 속에서 피어난 꽃, 랏어스 플라워. 거기에 '많은'의 뜻을 가진 a lot of 을 곁들여 우리들 존재의 귀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봅니다. 돌이켜보면 낯부끄러운 이름과 뜻. 같은 이름으로 공방을 열 생각이었는데요, 공방 준비하던 중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이름의 가구 업체를 보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아쉬움은 없었어요.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큰 애정을 쏟지 않는 편이라.

'이름을 바꿔야지. 한글을 쓰고 싶다. 말장난 같은 이름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순한글도 좋지만, 한 단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한자를 쓰자.' 고민이 깊던 시기. '내가 정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동시에 무엇도 되지 않을 수 있다. 뒷걸음질 치는 것도 괜찮다. 아직은 그래도 되는 나이다. 그러니 목공방 이름에 나무에 관련된 낱말은 넣지 말자.'

저는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책과 드라마, 영화를 좋아했고요. 노래도 좋아했습니다. 팝보다 우리말로 된 노래를 좋아습니다. 머릿속에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곡을 애정 했습니다. 저도 그런 가구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가구를 만든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게 더 알맞겠습니다. 재료는 나무. 따뜻한 성질의 이야기를 선호했습니다. 글도, 사진도, 나무도.

가구를 '만든다',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사진을 '찍는다'. 아니, 가구와 글과 그림과 사진을 '짓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지을 작(作)을 쓰자.

사람들은 내가 지어내는 것들을 모두 다른 재주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모두 이야기일 뿐. 그러니 이야기 담(談)을 쓰자.

따뜻한 성질이라면 따뜻할 온(溫)을 써야 하겠지만, 온작담은 발음이 어렵다. 매번 표정 구기며 "온. 작. 담." 말하고 있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좋을 호(好)를 쓰자. 성질은 내가 드러낼 테니 좋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으로 하자.

디자인 전공하면 좋은 점 : 로고 디자인에 돈 안 써도 됨
디자인 전공하면 좋은 점 : 로고 디자인에 돈 안 써도 됨

공방 이름은 호작담이 되었습니다. 공방을 연 뒤로 친해진 들은 저를 용호보다 작담이라 부르고요. 호작담 로고 비하인드와 변천사를 꺼내놓고 싶었는데, 그러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만 맺어봅니다. 어쩌면 다음 주에 이어 이야기할지도요!


 

 

한 주간 많이 들었던 음악을 늘어놓는 작담 플리 2025년 3월 넷째 주, 작담 플리

<윤상 - 벽>, <혁오 - Panda Bear>, <Jon Brion -  Theme (from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신인류 - 안식처>, <오대천왕 - 멋진 헛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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