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작담이 통신] 은퇴하는 순간까지 그 악당은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2025.01.03 | 조회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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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담이 통신

목수의 아무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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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면 으레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떠오르는 해에 소원 빈다던가, 처음으로 듣는 노래에 신중을 기한다던가. 금방 꺾일지라도 꿋꿋이 몇 가지 다짐을 하기도 하지요. 하룻밤 사이 다른 해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최애 아티스트의 신보가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새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 걸까요?

일종의 명분이겠지요. 어느 영화 속 대사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처럼 행동하기 위한 구실. 동력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에요. 지난해 저의 새해 다짐은 ‘선크림 잘 바르기’였습니다. 대외적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겠다는 게 있었지만, 남몰래 가장 주의를 기울인 건 선크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살면서 큰 다짐은 하지 않는 편이라 작으면서도 절실한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선크림 바르기, 물 자주 마시기, 방 청소하기… 그런 것들 있잖아요. 사소한 성취!

이건 성향과 닿아있는 일 같습니다. 제 경우에 명분에 기대면 본질이 호도되지 않을까 염려해요. 그러니까, 제가 올빼미 영화관을 계획했던 건 ‘공방의 온도는 늘 지상보다 낮고, 흰 벽과 빔 프로젝터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가 전부였는데, 친구는 목공방에서 영화 보는 모임을 해야 할 명분을 물었죠. 저는 명분을 찾느라 그해 여름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없었던 명분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어떤 때에는 이유를 찾느라 꿈틀거리던 기대가 사그라들기도 합니다. 물론 너무 들떠서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안될 일이지만, 바라던 것을 떠올릴 때는 조금 들떠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알고리즘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어떤 이가 수백만 유튜버라는데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알고리즘은 내가 관심 있는 것과 유사한 것들만 골라 보여줍니다. 파고들기에 좋지만, 다채로운 경험이 제한되는 건 위태롭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알고리즘을 벗어나기 위해 음악 앱에 들어가 신보를 뒤적입니다. 문득 지난해 나온 브로콜리 너마저의 싱글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애쓰고 싶지 않아요’라는 제목의 곡이더군요. 듣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곡이 많은 밴드인데, 최근 곡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 게 한참 유행이었잖아요. ‘쉬어가도 괜찮아’ 부류의 소위 힐링 문장들. 사실 저는 이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제 행보는 저런 문구들과 늘 반대편에서 목격되었습니다. '너는 언제 쉬어?', '너 스스로를 직원이라고 생각하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같은 말을 왕왕 들어왔다는 거예요. 쉬는 거 싫어할 사람 있나요? 그러면 내가 쉬는 동안 누가 일을 대신해주는 거냐고요.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고, 그건 곧 책임을 뜻하는데요.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스스로를 돌볼 책임도 있는데 그건 참 등한시했네요. 아니, 책임질게 왜 이렇게 많아요?? 

아무튼. 예능에 많이 나오는 서장훈 님 있잖아요. 그가 본래 농구선수였다는 걸 아시는지요? 선수 시절 그는 정말 대단했어요. 어린 시절 농구를 무척 좋아했던 제게는 그 모습이 선명합니다. 지금 이미지와 다르게 당시 그는 많은 농구 팬들에게 비호감의 대상이었습니다. 늘 인상 쓰고, 입 모양만 봐도 욕인 걸 알 수 있고, 심판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 악당 같던 선수는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뛰며 최다 득점 등의 위대한 기록을 달성하고 은퇴했습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목보호대를 차고 절뚝거리며 플레이했던 것으로 기억해요.그는 어느 방송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즐겨라'라는 말 되게 많이 하잖아요. 즐기는 자는 못 따라간다. 저는 세상에서 그 얘기가 제일 싫어요. 절대 믿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서 몰입하지 않고 성과를 낸다? 저는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농구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부터 농구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어요. 승부를 내야 하는 일을 가진 사람이 즐긴다? 그걸 저는 스스로 용납 못 해요." 저도 이쪽의 논리에 조금 더 공감하는 편입니다. 제가 가진 능력치로는 이 논리에 설득되더라고요.

저는 잠을 잘 잡니다. 짧게 자도 깊게 자요. 꿈도 없이 푹 잡니다. 게다가 요즘은 길게 자는 날도 많고요. 수명을 갉아먹을 정도로 뭘 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호호.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호호호.

 


한 주간 많이 들었던 음악을 늘어놓는 작담 플리 2025년 1월 첫째 주, 작담 플리

<박다울 - 거문장난감>, <사카모토 류이치 - KoKo>, <YDG - 어깨>, <BIG Naughty (서동현) -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feat. LEE SUHYUN)>, <딕펑스 - 미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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