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작담이 통신] 세상이 어렵게 해도 끝끝내 나를 지키는 사람

그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2025.07.04 | 조회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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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는 내 보호자였다. 세상이 날 어렵게 해도 끝끝내 나를 지키는 사람. 그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건강 검진을 받은 엄마는 큰 병원에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찾아간 큰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우니 CT를 찍어보자고 했다.

3, 4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방문을 불쑥 연 엄마는 '큰 병원을 가야 하는데, 아마 위암인 것 같다.'라는 말을 꺼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김치찌개에 참치 안 넣고 돼지 비계 넣었는데, 그래도 다 먹어.'라는 말처럼 하는 건지. 그때도, 이번에도. 검사 결과 들으러 가는 날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좀처럼 성장이라는 서사가 적용되기 어렵다. 이른 아침, 병원 향하는 차 안에서 엄마와 나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가득 찼지만 텅 빈 머릿속이었으므로.

서러웠다. 너무 일찍 아빠를 빼앗겼는데, 이제 엄마도 빼앗기나. 나는 고아가 되나. 고아는 어린아이에게만 쓰는 말인가. 지금 내 혼란한 마음은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으니 고아가 알맞겠다. 서른이 훌쩍 지나도 무서운 건 무섭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준비 한다고 준비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병원인지, 호텔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말끔한 꾸밈. 벽을 쓸어내리거나 모퉁이 액자 귀퉁이를 손으로 훑어도 손에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으리으리한 병원. 어딘가 불편한. 무엇을 쌓아 올려 이렇게 멋지게 꾸몄나. 저기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는 할머니가 쌓은 계단인가, 바퀴 달린 침대에 누워 의식이 없는 저 사내가 지은 기둥인가. 병원을 너무 악독하게 묘사하는 것 같네... 생명을 살리는 곳이기도 한데. 하지만 순간의 나는 그럴 수밖에. 나를 이곳으로 이끈 모든 게 미워 죽겠다. 매끄러운 모든 질감 중 나만 껄끄럽고 지저분한 부유물인 것 같았다.

키오스크로 접수하고 찾아 나선 소화기내과는 가는 길이 갈래갈래 다채로웠다. 여기도 소화기내과인데, 저기도 소화기내과란다. 소화기내과로 오래서 소화기내과로 왔건만,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내가, 엄마가 무슨 마음으로 여기 왔는지 알기는 하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어느 장이 떠올랐다.

 

검사 결과, 아무런 문제 없다는 말을 듣고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 몹시도 다행인 일. 더 빨리 뛰어도 상관 없었다. "정정심 님 보호자세요?" 물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였던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었던 엄마는 아이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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