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쓸 때 습관은 늘 네이버 블로그 창을 이용하는 것인데요. 아니 글쎄, 써둔 글이 사라진 것 아니겠어요? 물론, 저장은 해놓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성장은 저의 부족을 채워주기에 아직 역부족인가 봅니다. 더욱 성장하시길. 괜찮습니다. 또 쓰면 되지요.
최근 일하며 알게 된 대표님이 계셔요. 몇 살 많은 남자분이신데, 같이 일하기도 전부터 저를 몹시도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일단 의심하고 보는 저로서는 이상한 거죠.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온라인상에 끄적이는 게시물과 마주했을 때 생김새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기대감이 쌓였다는걸요. 까탈스럽고 이따금 짜증스러운 실제의 모습과는 별개입니다.
대표님과 이동, 작업을 함께 하는 터라 이튿날 정도 종일 붙어지냈는데, 신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좋은 말씀을 참 많이 해주셨어요. 저는 종교를 가지지 않지만, 꽤나 호의적입니다. 모든 종교는 철학적, 서사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워요. 어린 시절 토정비결 같은 걸 보면 늘 추천 직업 1순위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수긍하며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이는 교회 방송실에 반드시 있는 인상이라는 구체적인 묘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작업 이튿날의 끄트머리에는 문득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용호 씨는 이야기 나누다 보면 염세주의자가 분명하거든요? 근데, 염세주의자치곤 되게 발랄해요!" 스스로 염세적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낙관주의는 아니어도 염세주의까지 갈 일인가? 싶었어요. 그 뒤로 가끔씩 스스로를 관찰했습니다. 타인과 이야기 나눌 때 특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본래 쓰던 말의 결이 어떤 것인가 하고요. 놀랍게도 염세주의에 가까웠어요. 사람은 눈이 밖으로 나있어서 스스로를 볼 수 없다더니. 타고난 유순한 성질과 스스로 꾸려온 뾰족한 성질이 달라붙어 어느덧 저는 발랄한 염세주의자라는 끔찍한 혼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싫지는 않았어요. 맹하게 보이면 바보인 줄 아는 사람을 워낙 많이 겪었으니까요.
수년 전에는 '긍정의 힘'이라는 키워드가 대대적으로 유행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타고난 청개구리랄까요? 그러니까 책의 내용은 하나같이 긍정을 외치는 사회에서 원하는 결과에 닿지 못했을 때 몰려오는 상실감은 무엇으로 치유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에 관한 게 아니라, 어느 쪽이든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건 좋지 않다는 거였어요. 늘 쫄보로 살았던 저는 해내지 못했을 때 겪을 상실감이 두려워 긍정의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두려움에 잠식당했던 것입니다. 요즘은 좀 상냥해져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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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닮고 싶다. 혹은 누군가의 재주가 탐난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 배우 박정민의 글 솜씨를 연신 탐내고 있습니다. 그가 발행했던 레터를 구독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잘 안 보다가 최근 메일함에 쌓인 그의 글을 곱씹곤 합니다. 프로페셔널 작가의 글에 비하면 군더더기라고 할만한 꾸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지만, 되레 퐁실퐁실한 쿠션 역할을 해내는 탓에 몹시도 매력적입니다. 일상의 낱말을 쓰면서도 입체감이 돋보여요.
그가 쓴 레터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은 시가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짧고 함축적으로 해야 하니 말입니다. 심지어 상대가 즉각적으로 못 알아먹는 것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오래오래 생각해서 기어이 해석을 해내는 것도, 그리고는 너 어제 왜 그렇게 말했냐고 따져 묻는 완벽한 오역에, 네? 넹. 넴. 넵.' 등을 적절히 섞어 만들어내는 나의 운율 섞인 대처까지. 과연 현실은 시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까만 속과는 달리 끝끝내 미소를 유지하는 얼굴은 이 비극의 방점, '시적 허용'이겠고요."
저는 며칠 전 시집 세 권을 샀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책을 사지 않고 전자책만 봤는데, 유독 시집만큼은 종이책이 좋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둔 말에 이름 붙이기가 어려울 때는 시를 읽으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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