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칠리아에도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날이 추워지고 바닷가에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며칠 전에는 서머타임이 끝나서 다시 원래 시간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만 되어도 해가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한다. 공기도 차가워지고 물에 비치는 햇살도 왠지 모르게 가을빛을 띠고 있다.
호텔 손님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해가 지고 나면 호텔 바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 정도로 저녁 날씨가 쌀쌀하다. 레스토랑도 이제는 저녁에 실내에서만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호텔 사람들 대부분이 10월에 계약이 종료되기 때문에 이번 주에는 벌써 몇 명에게나 작별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끝까지 남는 건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년을 향한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내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이탈리아에 온 뒤부터 마치 다른 세계로 건너뛰어 온 것처럼, 막 태어난 사슴이 걷는 것처럼, 시간도 나도 휘청휘청거리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불확실한 순간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내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처음부터 확실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시간이 흐를수록 아는 것이 없어진다. 그 와중에 더 또렷해지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나의 직감을 믿어야 한다는 것. 만약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직감일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 떠오르는 판단력이라고 해야 할까. 직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느낌보다는 이미 정해져 있는 길처럼 느껴지는 확신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 직감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직감을 따라 살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너무 오래 의심하고 설명하려 들면 처음 떠올랐던 그 고요한 확신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필요하다.
처음 카타니아로 오기로 마음먹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사실 그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 아무런 계산도 계획도 없이 피렌체에서 짐을 싸서 카타니아로 오기로 결심한 날. 피렌체의 집을 2주 만에 정리하고 카타니아에 도착했을 때, 바로 그날 친한 친구를 통해 와이너리 인턴십을 소개받았다. 어느새 시칠리아 생활도 벌써 1년이 넘어간다.
그렇다고 매번 그 확신을 곧바로 따라가지는 못한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행동하려 하면 온몸에 주저함이 퍼진다. 아직 수련이 부족해서인지 그 감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조금씩 그 시간을 좁혀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질 때마다 오히려 이 울림을, 이 확신을 따라가려고 한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삶이 어떤 모양이어도 괜찮다고 믿는다면, 나도 어떤 모양의 삶이든 살아보고 싶다. 믿는 그대로 살고 싶다.
이제 호텔에서의 시간도 한 달 조금 더 남았다. 몇 명에게 더 작별 인사를 해야 할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길 또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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