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 모서리 선언문

무신론자의 신앙

2023.07.29 | 조회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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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문득 그런 예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여기에서 '좋은 글'은 객관적으로 잘 쓰여진 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쓰고 난 후의 마음이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죠. 쉽게 말하자면,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성장시키는 글이라고 할까요?

아주 날것의 일기가 아닌, 누군가에게 읽혀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의도적으로 모난 표현들을 피해 왔습니다.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단어들을 말하는 데에 지치기도 했고, 제가 그런 말들과 가깝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어요. 온화한 사람을 흉내 내고 싶었던 거죠. 창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둥글게 말하다 보면 제가 가진 모서리들도 둥글게 깎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도 했죠.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작업. 언젠가는 차려 입은 옷도 하나씩 벗어 알몸이 되어야 하는 법. 최근에 그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어요. 글 속에 꺼내 놓을 수 있는 제 모습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까지 내보인 모습만으로는 글에 한계가 있다는 것, 그늘져 있던 마음에도 빛을 비추어 조금씩 옮겨 적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마자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자,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최초로 돋아난 가시를 찾게 된 거예요―저는 양극화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최초와 최후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긴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상할 수 있듯이 실패였답니다.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상세하지 않기도 하고,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모서리'에 대한 기준에 의문이 생겼거든요. 타인을 처음 질투한 것이 최초의 모서리가 될 수 있나? 타인을 미워하거나 저주한 경험이야말로 제대로 된 가시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가시 덤불처럼 얽히자 저는 타임머신에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죠.

매무새를 가다듬고 저라는 이름의 숲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만날 수 있었어요. 아. 저는 저를 짓누르고 있던 갑옷을 벗은 듯 가뿐해졌습니다. 걷지 않아도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구요. 제 감정의 근원을 물질로 표현하면 피아노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어요.

진은영 시인의 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처음으로 미움이 돋아난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사랑이 번져간 시절은 생각난다". 『불한당들의 모험』이라는 시집의 첫머리에 적힌 구절입니다. 그 말이 정말 딱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처음으로 사랑이 번져간 시절이 생각나거든요. 몇 살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엄마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의 문을 처음 열던 순간이 사진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어요.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발바닥에서부터 사랑이 번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구요? 너무 좋아해서 울어 본 적, 사람이 아니라 피아노 때문이었거든요.

슬프게도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어서 저 역시 피아노와 오랫동안 이어져 있지는 못했어요. 그 탓에 피아노를 치는 세상의 모든 이들이 사라지기를, 그 당시에는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바랐죠. 저만 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피아노를 가질 수 없으니, 다른 이들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는 유치한 심보였죠.

그때부터였을까요? 세계에 대한 막연한 원망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 건반 대신 펜을 쥐고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지만, 쓰여지는 문장에는 무력한 슬픔이 늘러붙어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그보다 더 날이 선 뾰족한 단어들이 습관이 되었고, 20대 초반까지도 이어졌어요.

저는 어느 날 저의 감정 스위치가 꺼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 그대로 끊임없이 토해 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흔적만 남긴 채로 사라질 리가 없어요. 물론 흔적은 선명히 남아 있지만요. 그래서 여전히 날카로운 감정을 쏘아대고 싶은 욕구를 애써 누르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처음 고백하는 거예요. 제가 사실은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의식적으로 단어의 거스러미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 저는 오늘도 제 안의 모서리와 열심히 싸웠는걸요. 물론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그런 가시마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는 더 엄격해지는 법이잖아요.

저에게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였으니 저는 앞으로 조금 더 다양한 글을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숨겨 두었던 기억과 감정들을 꺼낼 수도 있겠구요. 조금 더 떳떳할 수도 있겠죠.

글을 쓸 때만큼은 부끄럽지 않고 싶습니다. 과거의 저에게도, 현재의 저에게도, 미래의 저에게도 숨기지 않아도 될 글을 쓰고 싶어요. 그런 날들이 오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어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예감은 아마 그 마음으로부터 자라난 것일 테구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좋은 일기'를 쓰고 계신가요? 혹,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게 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일기장 앞에서는 말이 없어지신다면, 오늘의 저처럼 선언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꿈으로 찾아가 읽어 드릴게요. 그 용기와 노력을 알아챌게요. 오늘의 여러분들이 저에게 그렇게 해 주셨듯이.

 


 

산문집 출간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한계가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 나는 어떻게든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다고 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거슬리고 초조한 기분 또한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이리저리 기웃대던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제는 정말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왜 '정돈된 나'에 집착하는 것일까. 글이라는 것은 사실 사랑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글을 향한 독자의 사랑이 작가를 향한 것일 수 있는 걸까. 어지럽게 얽히는 질문들의 그림자에는 소심하고 어디를 가도 겉도는 한 여자 아이가 발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소속감을 느끼며 살아남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운명처럼 글이 나에게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글이라는 건 나에게 구명 조끼였다는 것.

어린 시절의 나는 평범하고 싶었던 마음만큼 특별하고도 싶었다. 그런 마음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신성을 쥐어 주었다. 글과 사랑, 사랑하는 사람처럼. 무신론자이면서도 누구보다 종교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섬겼다. 특별한 것을 사랑하면 나도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안다.

그 착각 속에 빠져 나는 '단정한 나'만을 글로 옮기고, 글을 읽은 이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시선들을 느끼지 않으면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지나치게 경멸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인의 시선은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내가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입체적인 나의 모든 면들을.

그러다가 마주한 글이 2년 전의 일기였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의 모난 부분들을 모른 체하지 않겠다고 썼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사람은 관성의 동물이라서 이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선언한다.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성장했고, 그때와 지금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덧붙여, 말이라는 것은 뱉을수록 힘을 얻을 때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혹은 쓰는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그런 목적성이 뚜렷한 손짓이지만 그림자에 숨어 우는 아이를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그 아이를 빛이 드는 쪽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여기저기 멍들고 생채기가 난 곳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건 어쩌다 그랬니, 물어보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야 한다. 과거를 잊은 이에게 미래는 없는 법이니까.

다시. 나는 숨을 길게 내뱉는다. 눈을 뜬다.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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