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엇 게임즈(이하 라이엇)가 <리그 오브 레전드> 디지털 상품인 '감정표현'의 수익을 LoL Esports에 참가하는 팀들과 나눈다고 합니다.
지난 13일, LoL Esports 공식 블로그 글 '글로벌 감정표현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세요!'에 따르면 각 지역의 모든 팀들과 협력해 제작한 감정표현을 오는 27일(중국은 28일)부터 구매할 수 있습니다. 각 감정표현은 350RP로 구매할 수 있으며 총 수익의 30%는 디자인을 도와준 팀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하죠.
그 동안 라이엇은 LoL 프로게임단들로부터 많은 요구를 받아왔습니다. 야심차게 출발한 프랜차이즈 리그에 참여한 게임단들 대부분이 재정난에 빠졌기 때문인데요.
e스포츠를 운영하는 게임사가 게임 내에서 e스포츠와 연관된 상품을 팔고, 이 수익을 팀들과 나누는 모델은 이제 꽤 익숙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는 규모에 비해 이런 모델의 도입이 제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인게임 이스포츠 컨텐츠 판매를 통해 활로를 개척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 동안 라이엇은 LoL Esports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어떤 고민을 해왔을까요? 언제부터 생각이 바뀌었을까요? 그리고 왜 이런 대답을 하게 됐을까요? 지금부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고민의 시작
LoL Esports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구조를 가진 e스포츠입니다. LCK(한국), LPL(중국), LEC(유럽), LCS(북미)를 비롯해 CBLOL(브라질), PCS(APAC) 등 총 8개 지역 리그가 운영되고 있고, 정기적인 국제 대회와 월드 챔피언십을 통해 매년 큰 이슈를 만들고 있죠.
덕분에 LoL Esports는 다른 e스포츠에 비해 더 많은 게임단이 운영되고 있고, 주요 리그들은 모두 프랜차이즈로 진행됩니다. 프랜차이즈 게임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금을 확보, 약 1,000만 달러를 내고 리그에 참가했습니다.
참가비를 내는 대신 리그가 버는 수익의 일부를 공유 받는 모델은 기존 프로 스포츠에서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합니다. LoL Esports가 게임단들에게 줄 수 있는 리그 수익이 크지 않았던 것이죠. 동시에 게임단들 역시 재정난에 빠지면서 LoL Esports 위기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투자를 받은 일부 게임단들의 방만한 운영과 선수들의 연봉 인플레이션이 위기를 가속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000만 달러의 비용을 내고 참가한 리그에서 수 년째 기대 이하의 수익을 배분 받는 상황 역시 문제입니다.
라이엇 역시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었습니다. 지난 2023년 4월, '라이엇 게임즈에서 만들어가는 스포츠의 미래'라는 글을 통해 현재 상황을 인지했으며 향후 어떤 방향성을 추구할 것인지 예고한 바 있었죠.
VCT에서 시도된 것들
이때쯤 라이엇 게임즈는 <발로란트>의 e스포츠인 VCT(발로란트 챔피언스 투어)에서 꽤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이미 2021년부터 LoL Esports를 통해 e스포츠의 수익성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VCT에서는 다른 방향의 접근을 시도한 것이죠.
지난 2022년 시작된 VCT 프랜차이즈는 LoL Esports와 비교했을 때 다양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라이엇이 직접 관리하는 1티어 대회의 규모, 참가비의 유무,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의 매출 배분입니다.
- VCT는 최상위 리그를 권역 대회(북미, 유럽, 퍼시픽, 중국)로 진행하기 때문에 참가하는 프랜차이즈 팀 갯수가 적다. 2025년을 기준으로 각 권역별로 12개 팀이 될 예정.
- 이와 달리 LoL Esports는 약 100여개의 팀이 생태계 내에 존재하고 라이엇은 이들을 모두 관리해야 한다.
- LoL Esports 프랜차이즈 팀들은 1,000만 달러의 참가비를 내야하지만, VCT는 내지 않는다. 대신, VCT 팀들은 매해 라이엇이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참가 자격이 유지된다.
- 전체적인 규모의 차이로 인해 VCT는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 제작 및 판매 측면에서 훨씬 쉬운 구조를 갖는다. FPS와 MOBA라는 게임 장르의 차이도 여기에 영향을 준다.
- VCT 팀들은 시작부터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에 대한 일정 비율을 지급 받았다. 마케팅 활동을 열심히 하면 인센티브를 받기도 한다. 이와 달리 LoL Esports는 대회 수익금의 일부를 지급 받는다.
LoL Esports의 특수성
LoL Esports가 e스포츠 역사상 참가비를 받았던 유일한 프랜차이즈 리그는 아닙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는 참가비에 매년 일정 금액의 회원비를 내는 형태였고,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리그'는 무려 2,000만 달러에 달하는 참가비를 내야 했죠.
이렇게 팀들이 참가비를 내고 리그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주최사(게임사)가 출전하는 게임단들의 생계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큰 책임을 요구 받게 됩니다. 반대로 게임단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VCT에서 라이엇은 팀들의 생존을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LoL Esports에서 라이엇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가맹점주를 모았으나 기대 만큼의 수익을 안겨주지 못하는 프랜차이즈 본사와 같은 존재인 것이죠.
리그 참가 수익금의 분배는 매력적인 최소 생존 비용입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리그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LCK의 팀분배금은 2012년 98억 원에서 2022년 84억 원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LCK는 2023년까지도 적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죠.
LCK 법인은 리그가 돈을 못 벌어도 모회사인 라이엇 코리아가 게임으로 돈을 벌고 있어서 괜찮지만, 프랜차이즈 참가 팀들은 '게임으로 돈 잘 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얼마 안되는 리그 수익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게임과 e스포츠의 매출을 결합 혹은 연결하기 위한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 매출 배분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e스포츠를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는 게임사들이 e스포츠씬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클라이언트가 오래 되기도 했고 게임 특성상 아무리 작은 변화나 추가점이라고 하더라도 게임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의 기획, 디자인, 개발에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oL Esports가 지속가능하기 위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가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VCT 외에 <도타 2>, <카운터 스트라이크 2>의 밸브, <레인보우식스 시즈>의 유비소프트도 이를 통해 게임단들을 지원하고 있으니, LoL Esports 역시 가야할 길은 명확했습니다.
라이엇의 새로운 계획
LoL 게임단들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특히, LCK에서는 2024 시즌 개막을 앞두고 팀들이 공동 성명서를 발표해 리그 수익과 배분 구조의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세부 원인은 다르겠지만 LCS와 LEC에 참가하는 팀들 역시 상황이 악화 되었고, 리그로부터 받는 수익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미국 저널리스트 'Thorin'은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프랜차이즈 시작 이후 총 수익 공유는 약 8천만 달러에 불과하다"며 "LCS 팀들은 현재까지 2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지만, 연평균 수익은 220만 달러에 불과하다"며 LCS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지난 2022년 한 LCK 팀에서 일했을 당시, LCK로부터 들어오는 수익 배분금의 규모를 보았을 때 상당히 적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라이엇은 결단을 내립니다.
지난 3월 14일, 라이엇은 '리그 오브 레전드 이스포츠 전략 조정'이라는 블로그 글을 통해 'GRP(Global Revenue Pool, 수익 총괄 적금)' 계획을 공개했습니다.
GRP는 후원보다 상한이 높고 불황에 덜 흔들리는 디지털 콘텐츠 매출을 주수입원으로 끌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요. LoL e스포츠 디지털 수익의 총합을 적립하여 3가지 기준에 따라 팀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VCT에 도입한 것과 비슷한 파트너십 모델을 LCK, LCS, LEC 프랜차이즈 팀들에게(LPL은 논의 중) 제시하는 것입니다. 배분되는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반 배당 : GRP의 50%는 일반 배당으로 분류하며 1급 팀에 할당합니다. (1급 팀은 메이저 프랜차이즈 지역을 말하는 듯 합니다)
- 경쟁 배당 : GRP의 35%는 경쟁 배당입니다. 경쟁 배당은 팀의 성적에 따라 분배하며 지역 리그 순위와 국제대회 순위 등 2개의 갈래로 나뉩니다.
- 팬덤 배당 : GRP의 나머지 15%는 팬덤 배당에 들어갑니다. 팬덤 배당은 선수, 리그, 팀의 브랜드에 대해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팀에 수여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할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발표된 내용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식으로 자금을 모으고 이를 운용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LoL Esports가 VCT처럼 디지털 e스포츠 콘텐츠(팀 스킨, 팀 감정표현, 팀 프로필 등)를 판매해 수익을 쌓아 그걸 팀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의지와 방향성 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글로벌 감정표현 판매, GRP의 예고편?
이번에 발표된 글로벌 감정표현은 지난 4월 2024 MSI 때 예고되었습니다. 다만 이게 3월에 발표한 GRP의 일환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디자인에 참여한 모든 팀들에게 30%의 수익을 나눠 준다는 것을 보면 GRP과는 다른 모델인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래도 라이엇이 이런 대규모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 제작을 시도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GRP 역시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 판매를 통한 기금 운용이 핵심이기 때문이죠.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는 사실 개발도 개발이지만 기획이 더 어렵습니다. 스킨을 하나 만들더라도 각 팀의 정체성과 니즈를 파악해야 하고, 만드는 과정 중간중간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지난 2023 11월 말에 롤드컵에서 우승한 T1의 팀 스킨은 2024년 8월 중순에 출시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롤드컵 우승 스킨이라 더 오래걸리기도 했겠지만요.
때문에 GRP를 위해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를 최대한 빠르고 많이 출시하려면 전담 팀 운영을 통한 작업 프로세스 효율화가 필수적입니다.
유비소프트의 경우 <레인보우식스 시즈>의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 제작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릅니다.
1. 팀별로 스킨 제작을 원하는 총기, 파츠,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결정한다.
2. 팀들은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에 따라 디지털 이스포츠 콘텐츠에 대한 디자인을 진행한다. 이 때 디자인 가이드는 유비소프트가 제공한다.
3. 유비소프트는 팀들이 제작한 디자인을 해당 총기, 파츠에 적용해 인게임 판매를 시작한다.
이렇듯 게임 장르는 다르지만 디자인의 일부 영역을 게임단에 맡기는 방법도 프로세스 효율화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컨셉에 대한 기본적인 스케치를 각 팀이 직접 하도록 해도 초반 기획 단계의 리소스를 상당히 아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나저나 올해 중반에 개발 중인 콘텐츠의 정보를 공개한다고 하긴 했는데, 설마 이 감정표현이 그건 아니겠죠? 팬들과 게임단들을 더 설레게 만들 흥미로운 콘텐츠 소식을 기대해 봅니다.
GRP에 대한 우려와 향후 전망
북미 매체 '스포츠비즈니스저널'의 'Kevin Hitt'는 'Less guaranteed money could hurt smaller teams in League of Legends esports(보장된 수입이 적을 수록 작은 팀들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Q. 라이엇의 지원이 지금보다 많아질까요? 적어질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LCS 관계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스포츠비즈니스저널이 LCS에서 제기한 이슈들은 LCK도 해당됩니다. LCK 역시 세부적인 GRP 운용 플랜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가볍게 생각해봐도 몇 가지 논쟁점이 떠오릅니다.
디지털 이스포츠 컨텐츠 판매량에 따라 GRP 배분이 이루어진다면 T1, Gen.G 같은 인기 팀들이 기금의 대부분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 판매량을 똑같이 10등분 한다고 하면 오히려 T1, Gen.G 같은 인기 팀들에 대한 역차별이 되겠죠.
경쟁 배당, 팬덤 배당의 경우도 전력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는 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몇몇 큰 팀을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나마 LCK는 모든 팀들이 컨텐츠 제작, 팬덤 관리를 위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다른 메이저 지역보다는 전력의 불균형이 그나마 나을 것 같긴 하지만 팬덤의 절대적인 화력 차이가 수익 배분에 큰 차등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리그와 참가팀 모두가 안정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모델을 고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포츠 컨텐츠 제작 및 판매라는 커머셜 행위는 물론, 팀들의 입장과 사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디지털 , 수익을 어떻게 나누고 기금을 어떻게 운용할지를 합의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와 팀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GRP, 디지털 이스포츠 컨텐츠 판매 등 중요한 시스템적 변화가 조만간 가동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협화음과 갈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LCK 총회 때 이 안건이 논의되고 있을지, 아직 논의 전이라면 앞으로 어떤 분위기에서 논의될지도 상당히 궁금하네요.
팬들 역시 LCK와 게임단들의 위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상호 윈-윈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조만간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보면 좋겠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