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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수필] 오후의 산책

2025.03.31 | 조회 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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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오후 네 시쯤. 남편은 아르바이트하러 나갔고, 나 홀로 집에 남았다. 창밖으로 가득한 저 햇살을 놓치기 싫어 얼른 외출할 수 있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간단히라도 외출 이유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아, 가까운 동네 마트에서 오이를 사겠다 마음먹었으나, 2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밖으로 걸어가다가 지갑을 놓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요즘 계좌이체로도 많이 결제하니까 괜찮지, 일단 좀 걷자.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오래된 상가건물을 그냥 지나치려다 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세탁소 말고 더 운영하는 가게가 있을까 싶어서. 아는 사람만 드나들 것 같은 음악 관련 문화단체 사무실 간판이 보였고, 두 칸짜리 상가 우편함에는 하얀색 우편물이 터져나갈 듯 꽂혀있다. 세탁소 유리문 안에선 아저씨가 텔레비전을 본다. 상가 구경을 빠르게 마치고 나와, 막다른 길까지 쭉 걸어 올라갔다. 지도상으로는 여기가 길의 끝이다. 골목 끝 좌측으로 휴대전화 지도로는 나오지 않았던, 차는 다닐 수 없지만, 사람은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계단 길이 있다.

나무로 바닥을 깔아놓은,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의 짧은 산책길. 낮은 계단을 올라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거칠게 흙바닥 위로 깔아놓은 길 사이사이에 피어난 파릇한 생명들을 보며, 울타리로 구분 지어 둔 경계 틈으로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며.

짧은 길이 끝나자 다시 지도에 나오는 차도와 만났다. 차도 옆에 난간 있는 옹벽 길이 나왔다. 옹벽을 옆에 두고 그림자와 함께 나란히 길모퉁이까지 걸었다. 처음 가보는 길은 이만하면 많이 걸었으니, 이제는 알던 길로 걸어 동네 마트에 가려 했는데, 평소보다 차던 바람 때문이었는지 휴대전화가 고새를 못 참고 꺼져버렸다. 계좌이체도 할 수 없다. 마트는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왔던 길로 돌아가야지. 다시 옹벽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난간을 따라 그 아래에 담배꽁초가 잔뜩 있다. 누군가는 이 난간에 기대서 연기와 한숨을 내뱉었을까. 다음엔 쓰레기 봉지를 가지고 나와볼까.

 

재난이 가득한 이 시대에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특권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에는 산불이, 어딘가에는 지진이, 또 어딘가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순간에, 나는 여유롭게 햇살을 맞으며 시 창작 수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수업 점수를 A+ 받았던가?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수업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멋모르고 냈던 첫 과제의 내용과 심보선 시인을 무척 좋아한다던 친구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에게 시적인 순간을 적어내라던 과제에 나는 노을 있는 풍경’, ‘아름다운 꽃같은 감상적인 것들과 함께 트램펄린 타는 순간을 써냈다. 트램펄린, 방방을 타는 것처럼. 꼬리뼈에서 목구멍까지 무언가 차올라 일렁이는 느낌. 그 느낌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그네 위에 올라타, 앞으로, 뒤로 몸을 흔들며 생각했다.

 

이제는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홀로 그네를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 앞으로, 뒤로, 앞으로, 뒤로, 스윙, 스윙, 진자운동. 아파트와 옹벽 사이 작은 틈에 그네 한 쌍만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어린이를 위한 그네라고는 하지만, 놀이터에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오지 않는다. 나는 그네를 독차지하고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탄다. 파랗고 맑은 하늘과 차가운 바람만이 동석자다. 매끈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왜 그리 재미없게 점수에만 집착하는 대학 시절을 보냈는가 생각해 본다. 막연히 졸업하면 다 쓸모가 있을 거로 생각했던 학점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다.

 

그네를 온몸으로 밀어, 바람을 타고 유연히 흔들리는 것에 능숙해진다. 나는 혼자서 그네를 앞으로, 그러다 뒤로, 다시 앞으로, 그러다 뒤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네를 탔다. 앞과 뒤를 오가며 그 안에 머물렀다. 땅에 떨어지지도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그 사이에서. 일상에 쏟아지는 사건과 사고들을 벗어나서, 그저 지금 당장 내가 감각하고 있는 것들을 느끼면서, 그네 위에서 머물렀다. 볼 위를 스치는 바람과 몇 시간 지나면 사라질 햇볕,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독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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