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수필

[무구수필] 나와 함께 걷기

2026.03.31 | 조회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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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걸어볼까? 날이 따뜻해지니 마음먹기 쉬웠다. 기분 좋은 날씨를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니, 안 할 이유는 없었다. 걸으며 두 발을 지면에 딛고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조금 더 사람다워진 기분을 느꼈다. 사람다운 기분이라니, 그럼 평소의 나는 사람답지 않은 기분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무엇이 나에게 사람다움을 선사한 것일지 고민하다가, 또 다른 걷기의 경험을 떠올렸다.

 

38,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다. 다른 사람이 미리 만들어 둔 피켓 하나를 골라 들고, 그날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요일 낮,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 한가운데로 우리는 걸어갔다. 주최 측에서 미리 신고해서 경찰도 행렬 끝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개중에는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날 선 말을 내뱉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행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 들을 일이 없었을까?

부끄러움과 낯섦,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을 마주하면서도 계속 사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목적지에 도달해서는 한 편의 시 낭송과 몇 곡의 노래를 듣고 모임은 해산되었다. 나는 거리를 걸으며 웃지도 않고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그들과 속도를 맞춰 함께 걸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꼭 그 행진의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여성의 날을 알리고 축하하는 것, 그 목적을 위해 걸었다.

함께 걸었기에 세상이 바뀌었을까. 그렇게 대단한 변화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알리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디에서 누군가와 함께 걷는 일만으로도 그걸 표현할 수 있다니, 생각보다 꽤 쉽고 괜찮은 일이었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아주 어렸을 때 배웠을 걷기는 이제 의식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어딘가 크게 다치지 않고서야, 나는 늘 자연스럽게 걸으며 살겠지. 그래서인지 단순하게 느껴지는 걷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내가 누구와 함께 걷기로 하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지. 사소하고 가벼워 보이는 결정들 속에 나라는 사람이 드러난다. 내 삶은 내 육체를 통과하며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과 함께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제약과 한계가 있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날씨가 좋아서 대중교통이 아닌 두 발로 걷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몇 번 그렇게 걸어보니, 생각보다 나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날마다 나는 사람다운 기분을 느끼며 걸을 수 있을까? 아마 그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서둘러야 하고, 날씨가 항상 좋은 것도 아니며, 몸 상태가 늘 괜찮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발맞춰 걸었던 행진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내가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걷는다면, 좀 더 사람다운 기분을 자주 느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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