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실 광주로 내려온 이후 대부분 엄마가 먼저 나에게 연락하곤 했다. 나는 늘 그랬듯 무심하고 살갑지도 않은 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꽤 오랜 공백 후에 온 연락이었다. 보고 싶어서,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말 뒤에 있는 그늘을 나는 이렇게 추측했다. 뭐 하고 지내나, 별일은 없나, 먼저 연락이 오려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그래도 엄마니까 내가 먼저 연락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인가 나는 엄마의 모든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깨닫게 되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사실,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나의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엄마를 인지하게 되며 동시에 엄마는 참 나와는 다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엄마는 늘 똑같지, 뭐, 잘 지내고 있어, 넌 별일 없니, 라는 말로 화두를 내게 토스했고, 엄마의 의도대로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간 새로 생겨난 내 일신상의 변화를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내 딸, 아주 잘 지내고 있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하며 싱거운 대화를 하다 통화가 끝났다.
거짓말. 엄마가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엄마는 당근마켓에서 싼 가격에 괜찮은 옷을 샀다고 말했다. 평소에 옷 사줄까 물어보면, 입고 갈 데도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이지만, 엄마는 마음이 허할 때면 옷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옷을 산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 일부를 닮았다. 요 며칠간 나도 당근마켓에 괜찮은 옷 없나, 하고 한참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엄마는 그래서 그 물건을 샀다는 것이고, 나는 ‘찜하기’를 눌러둔 뒤, 기어코 내가 그 옷을 사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아서 구매하지 않은 것일 테다. 때때로 나는 살 생각은 없어도 그래도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것들을 ‘찜’해서 나만의 온라인 저장소에 다양한 물건들을 담아두곤 했다.
대신 충동적으로 집에서 5분 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무가당 요거트 두 병을 당근마켓으로 구매했다. 인터넷으로 본 간편 레시피를 따라서 그릭요거트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다이소에서 산 채반 위에 면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요거트를 붓고 유청이 분리되도록 선반 밑에 매달았다. 오후 세 시 반이 되니 약속 시간에 맞춰서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같이 책을 읽고, 질문거리를 나누며 답하고, 일상 이야기들을 나누고, 간단히 저녁을 만들어서 같이 밥을 먹었다.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는 짐을 챙겨 발레학원에 가서 저녁 수업을 듣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돌아오니 개운했다. 하루를 돌아보니 오후 네 시쯤 집 안으로 쏟아지던 햇살이 떠올랐다. 일부러 전등불을 다 끄고 집 안에 자연광이 가득 들어오도록 했던 그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가도 마음 한구석에 엄마와의 통화가 남아있었다. 엄마, 힘든 건 없어? 물어봐도 엄마는 늘, 괜찮아, 이런 건 힘든 것도 아니지, 하고 답했다. 심지어 내가 무언갈 힘들었던 것을 말해도 엄마는 괜찮아질 거야, 너가 지금 성장하고 있는 거야, 라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원망하다가도 안쓰럽기도 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냥, 엄마를 위해 기도 한 번 하고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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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grace
담백한 글이 이 밤에 따스히 다가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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