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었다. 여름과 가을 내내 바쁘게 하던 일은 끝났고, 수입이 끊겼다. 봄이 오기 전에 짧게라도 아르바이트를 구해보려 지원하고 면접 보고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자 자괴감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의 쓸모에 대해 자꾸만 생각했다. 고민 끝에 구직구인 사이트에 반복적으로 올라오던 가사도우미 모집에 지원했다. 지원 바로 다음 날 연락이 왔고, 근무일이 정해졌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친한 배우의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내가 가사도우미 알바를 결심하는 게 아주 어렵지 않았던 건 찬실이 덕이 컸다. 식당, 카페, 학원, 백화점 등 여러 일자리 중에서도 그나마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청소라는 생각도 있었다.
첫 출근 전날 밤잠을 설치고 오랜만에 먹은 아침밥은 얹힐 것 같아 평소보다 몇 배로 꼭꼭 씹어먹었다. 고객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102동 401호의 벨을 울리자, 아저씨가 마침 집을 나서던 참이었고, 나는 그 안에 들어섰다. 나의 고객은 70대로 보이는 노년의 여성이었고,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아서 몇 년 전부터 청소 인력을 구해 써왔다고 했다. 막연한 걱정과는 다르게 고객은 친절했다. 힘없는 노인의 얼굴을 보자 나는 할머니 댁 청소를 열심히 하는(사실 할머니보단 엄마 나이에 더 가깝긴 하다) 손녀딸의 얼굴이 되었다. 평수가 꽤 넓은 90년대 구축 아파트의 주방과 거실, 안방과 드레스룸 청소가 내게 주어졌다.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 구석구석 먼지 쌓인 곳을 물걸레로 가볍게 쓸어내고 나니 두 시간이 금방 흘렀다. 청소 마감 직전에서야, 나는 그 집 식탁 옆 벽면에 큰 유화 그림이, 거실 소파 위에는 수묵화가 걸려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 방문했던 가사도우미들에 비해 젊은 축에 속한 내가 맘에 들었는지, 혹은 깔끔한 내 청소 실력이 좋았는지, 고객은 내가 집을 나설 때 다음에도 또 보자는 인사를 했다. 내 가방엔 고객이 챙겨준 연시와 귤, 바나나가 잔뜩 들어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이니 집에서도 엄청 가깝고, 일반 아르바이트에 비해 시간 제약도 적고, 시급도 괜찮은 일자리를 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소하는 중에 계속 어떤 시선을 느꼈다. 돈을 벌기 위해 고객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다. 자격지심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가, 다시 그런 자격지심 느끼는 나를 나무랐다. 친절한 고객이 별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에서도 슬쩍 느껴지는 가시 같은 단어들이 있었다. 그 가시가 느껴지는 나를 보면서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하는 게 맞나, 고민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나의 가치와 의미를 정해도 타인이 그것을 존중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하다. 해도 돈이 안 되는 일은 쉽게 무시당한다. 그것만으로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때 실존은 쉽게 흐려진다. 그러나 생존과 실존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우위라고 단언할 수 있는 권리가 그 누구에게 있을까. 카프카는 확신이 담긴 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단식광대 이야기를 한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끝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자신의 단식 예술을 이룬 단식광대 이야기. 누군가는 왜 죽을 때까지 음식을 안 먹고 버텼냐며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생존보다 실존이 중요할 수도 있는 법이다.
청소를 한참 하던 중에 올해 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을 축하한다는 문자가 왔다. 홈페이지에 공고가 올라왔는데 나는 아르바이트 중이어서 못 본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지금의 나는 창작자, 작가이면서도 가사도우미이지. 그 모든 것이 나다. 나의 실존과 생존 사이의 고민과 수고의 몫은 나의 것이며, 그 모든 선택의 결과가 나의 삶을 이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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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환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누군가 요구하는 모습을 살아내야하는 게 실존과 생존 문제이지 않을까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과연 생존 문제가 해결 된다고 실존 문제가 해결될지도 의문입니다. 인생은 생존과 실존 사이 곡예하며 걸어야하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고 희망을 꿈꿔봅니다.
무구편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나가고 있는 도환님을 응원합니다. 또한 저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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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살기 위해 벌고 있는 것인지 벌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시기예요.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싶었는데, 이번 편지를 보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그래, 그 모든 것이 나다." 라는 문장이 저에게 위로가 많이 되네요.
무구편지
142님, 댓글로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142님의 댓글이 저에게도 응원과 격려가 많이 되었답니다. 새해에도 힘내서 함께 살아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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