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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수필] 다시 비가 와도

2025.07.31 | 조회 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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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광주에 너무 많은 비가 내렸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 나는 별생각 없이 긴 발목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외출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양말과 신발 모두 구석구석 빠짐없이 젖어있었다. 현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양말은 벗어서 세탁기로, 신발은 신발장 앞에 세워두고 물기를 말렸다. 그 다음날 낮에는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다가 저녁이 되니 다시 비가 내렸다. 언제 하늘이 맑았냐는 듯 무섭게 물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현관에 둔 운동화에 물기가 마를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며칠 뒤 빗물 마른 자국이 선명한 운동화를 두고 고민했다. 이걸 빨아, 말어. 이미 몇 년간 신어 군데군데 천이 터져있고, 생각해 보니 처음 산 뒤로 한 번도 빨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한 켤레 운동화를 화장실로 들고 갔다. 처음엔 새하얬을 운동화 끈을 풀어두니 구멍에 걸어둔 모양대로 때가 묻어있다. 운동화를 물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대야에 푹 잠기게 담았다. 가볍게 헹구고 난 뒤엔 세탁 세제를 풀고 화장실 구석에 뒀던 청소 솔을 들어 신발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비누 거품 사이로 조금씩 원래 색을 되찾는 신발이 보였다.

신발을 빨수록 솔을 붙잡고 문지르는 손과 팔, 어깨까지 힘이 들어갔다. 그냥 돈 주고 세탁소에 맡길걸 그랬나 후회가 될 때쯤, 돈 주고 맡긴 것만큼 완벽하게 세탁하기를 포기했다. 빗물 든 자국만 없어질 정도로만, 처음 샀을 때처럼은 아니어도 깔끔한 느낌을 주는 정도로만, 하자. 그러니 솔질에 들어가는 힘이 좀 줄어들었다. 힘주어 문질러도 때가 잘 안 지는 부분은 그냥 내버려뒀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신발을 빨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내 신발은 내가 빨아야 했다. 때 되면 신발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그냥 새것을 사면 좋을 텐데, 왜 굳이 힘을 들여 신발을 빨아야 하나. 내 것이지만 내가 산 것이 아니기에 깨끗이 빨았다. 깨끗이 쓰지 않으면 다음 신발은 없다는 엄포가 있었으니까. 성인이 되고, 내가 신발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생길 무렵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새 신발을 사 신었다. 신발이 쉽게 닳기도 했다. 유행이 금방 지나가기도 했다. 새로운 신발을 쉽게 살 만큼 돈을 벌고 쓸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절망에 빠지기 쉬운 시대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고, 급변화로 인한 영향과 피해는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뾰족한 해결이나 대안은 개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 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가 주변에서 쏟아진다. 내가 원한 적 없어도 수많은 정보가 내 생활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너무 쉽게 만난다. 우울과 분노가 자연스레 쌓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고, 소화되지 않아 부대끼는 마음을 그러안고 일상을 산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반짝이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내 손으로 빨았던 게 언제였더라. 그땐 세상에 대해 지금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비좁은 시야로 살았지만, 삶의 방식은 더 단순하고 명료했다. 아마 그때의 세계 역시 지금보다는 단순하고 명료했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는 가속이 붙어 점점 더 많은 변화와 혼란을 품게 되니까.

물을 머금어 한껏 축축하고 무거워진 운동화 아래에 손바닥을 받쳐 들고, 후다닥 베란다로 나갔다. 비가 그치고 이제 다시 폭염 경보가 발령된 일상. 잠깐 에어컨의 영향에서 벗어났을 뿐인데도 공기가 답답하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열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쳐놓은 블라인드 아래로, 햇볕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 자리에 운동화를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희망이 있을까? 누군가 던진 질문에 한 교수가 대답했다. 그럼요, 희망이 있고말고요. 왜냐하면 내가 희망이니까요. 내 속에 빛이 꺼지지 않으면 어둠은 없는 거죠.

내가 희망이라는 믿음. 그것이 내 안에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빛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 있고, 해가 드는 날이 있다. 나는 폭우에 쫄딱 젖은 운동화를 정성 들여 빨아, 폭염의 햇빛 아래 말린다. 운동화에 끈을 걸고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맨다. 깨끗하게 빤 신발을 신고, 다시 현관문 밖을 나선다

나는 희망을 찾아 헤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보니 이미 우리 집에 파랑새가 있었더라는 이야기처럼,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살아 숨 쉬며 고통을 느끼고 고민하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아직은 막연하고 여전히 떨리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에 힘입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내가 희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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