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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수필] 나의 독립일지

2025.12.31 | 조회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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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편지

춤추는 거북이 무구가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엄마,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김치는 냉장고에서 잘 익어가고 있어.

성탄절 당일, 고민 끝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인사말과 함께 김치의 안부를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이내 풋, 웃으며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다, 하고 답했다. 크리스마스 인사면 됐지, 왜 김치 얘기를 굳이 꺼냈냐고? 그건 12월 초에 엄마와 했던 대화 때문이었다. 엄마는 평소 밤 열 시쯤에 잠들곤 하는데, 그날은 열한 시 무렵 갑자기 전화가 왔다. 평소 같지 않은 시간에 걸려 온 전화가 의아해서 무슨 일 있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엄마는 별일 없다고 답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었다며, 저번에 보내준 김치는 잘 먹고 있냐는 말뿐이었다.

결혼을 기점으로 엄마와 나의 관계는 많이 변했지만, 물리적으로 거리가 생겼다고 완벽한 독립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결혼 초반엔 익숙한 편안함이 그리워 종종 엄마와 연락했지만, 점점 드러나는 건 결혼 전에도 후에도 완전히 잘 매듭짓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번은 통화를 하다가 엄마의 말에 내가 화를 냈다. 꽤 오랜 시간 그 통화가 이어졌고, 통화를 끝낸 뒤에도 나는 여전히 힘들었다. 침대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옆방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남편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혹시, 어머님께 복수하고 싶어서 그렇게 감정을 쏟아낸 것이냐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오히려 펄쩍 뛰며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려 애썼지만, 생각해 볼수록 그건 정말 유치한 복수였다. 심지어 내 감정 해소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어쩌면 습관처럼 엄마와 나 사이에서 반복되는 문제의 양상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과거의 문제가 어떠했든 간에 현재의 나는 그동안 내가 선택해 온 것의 결과였고, 엄마는 더 이상 나의 보호자가 아니었고, 심지어는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를 거쳐 우리는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 나의 독립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때부터 진짜 내 고민이 시작됐다.

이 고민을 주제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광주에서 청년들을 만나 다양한 예술 활동과 특강, 대화를 거쳐 글쓰기를 진행했다. 참여자 각자의 독립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면서도 여전히 내 한구석에 나는 어떻게 독립하지?’라는 질문이 있었지만 당장 해결하기 어렵다며 미루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프로그램은 끝났고, 나름의 성과와 결과물은 있는데, 정작 나의 독립은 여전히 다를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밤 열한 시쯤,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분명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는데 그걸 외면하고 주변만 스치듯 가볍게 자꾸 맴도는 것이 나는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한참을 빙빙 도는 대화가 이어지고 지쳐갈 무렵, 나는 결심했다. 최대한 감정을 덜고, 정확하게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엄마가 이해해 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내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우리가 되도록 피하려던 주제를 꺼내자마자, 나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고, 콧물 때문에 코가 막혀 말을 하다가도 휴지를 찾아야 했지만, 최선을 다해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엄마와 함께 대화하는 것이 힘들다고. 우리 사이의 문제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데,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나는 너무 힘들고 이상하다고. 당분간 엄마와 깊은 이야기는 할 수 없으니, 그저 김치 이야기만 하자고 말했다. 엄마가 내게 처음 물었던 안부 인사에 있던 김치. 이번 김장철에도 엄마가 직접 담가서 택배로 부쳐준 새 김치가 우리 집 냉장고에서 잘 익어가고 있는지,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시간 정도의 통화를 마치니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고,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눈물을 잔뜩 쏟아내고 말았다. 더 이상 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쉽게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던 편안한 시절이, 순수의 세계에서 살던 시절이 끝났다는 게 느껴졌다. 슬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그립고, 엄마에 대해 단순하고 긍정적인 감정만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번 통화는 저번과 좀 달랐다. 어딘가 내 마음이 차분했다. 더 이상 옛날 같지 않은 것이 슬프지만, 동시에 지금의 내가 좋았다. 좀 더 나답게 살기 위해서 그동안 선택하고 싸우고 애써온 것들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슬프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좋았다. 마음이 후련했다.

엄마에게 당분간 김치 안부만 얘기하자고 말한 뒤 몇 주 후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친정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화하면서도 어색한 마음에 엄마에게 연락할까 말까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김치 안부를 전하는 내 목소릴 들었을 때, 엄마는 어땠을까? 성탄절이니 오랜만에 목소리 들을 겸 전화했단 내 말에 엄마는 잘했다고 말했다.

 동치미가 잘 익었는데, 보내줄까? 순무 김치도 있고.

나는 순무 김치는 됐고, 동치미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며칠 뒤 빨간 고추장 통에 담긴 동치미를 받았다.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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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도환

    1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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