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초한 일들로 지쳐있던 날, 남편은 가벼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커피에 곁들일 디저트만 사 오기로 했던 외출이, 집에서 나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근교로 나가는 나들이가 됐다. 화순에 가서 점심 마감 시간 끝자락에 겨우 걸쳐 냉모밀과 돈까스를 사 먹고, 화순적벽과 환산정까지 들러 단풍을 보고 왔다. 평소라면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나도, 이날의 갑작스런 나들이가 즐거웠다.
남편은 나보다 덜 강박적이다. 그는 즉흥적인 선택과 결정에 유연하고, 미각이 예리하여 더 좋은 맛을 찾아낸다. 사람을 믿어줄 줄 아는 그는 상대방의 가장 좋은 모습과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는 교육을 통해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사람에겐 각자 그렇게 살게 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를 믿어주는 일의 가치를 안다. 그런 그가 길을 잃었노라고, 나에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을 그가 자꾸만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한 달을 돌아보며 일기장을 읽는데, 유난히 힘들어하고 피로를 호소했던 남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길을 잃고 다시 찾는 과정엔 온 마음과 힘을 다했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의 도움 요청엔 별다른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했던 말마따나, 그건 나의 길이었지, 너의 길이 아니니까.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답을 찾아주는 게 아니었을 텐데도, 심지어 나조차 타인에게 받았던 도움은 해법을 듣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자꾸만 그에게 이상한 해결책만을 제시하곤 했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 나를 낯선 상황과 관계 속에 배치할 때 나는 새로운 나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그의 문제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고픈 나를 본다. 그 미지의 세계와 혼란, 혼돈이 나에게 또다시 쏟아지지 않기를 바라기에, 나는 그저 그 표면만 훑고, 별 대수롭잖은 서류를 처리하듯 이 문제를 쉽게 넘기려 했다. 아무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 길일지라도, 나는 항상 누군가의 손을 통해 도움받았다. 이쪽이라고 안내하는 손, 잘하고 있다고 등을 토닥이는 손,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잡아주는 따뜻한 손. 그리고 가장 먼저 내게 그 손을 내미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어찌나 나는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오만한가.
19세기 유럽, 탄광 속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을 방지하기 위해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데리고 갱도에 들어갔다. 유독가스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새 덕에,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빠르게 탈출했다. 나는 남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가 마치 탄광의 카나리아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고통.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닌, 그를 둘러싼 환경이 지닌 문제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만 카나리아의 연약함을 탓하곤 했을까. 그건 아마 그게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밑바닥을 계속 내보이면서도 여전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하는 일. 염치없음을 알고서도 뻔뻔하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일. 좀 괜찮은 나인 줄 착각했던 것을 부수고 또 부수며, 비대한 자아를 깎아가는 일. 혹은 쪼그라든 자아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일.
사랑은 무엇이며 가족은 무엇일까.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가족과 살아가는 지금,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이것을 나는 점점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그것을 느끼고 겪어 보고 있어, 말을 아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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